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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5.25 던컨 에드워즈는 축구계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



by Daniel Taylor


사실 이런 질문과 관련해서 정말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은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정말로 던컨 에드워즈가 세계 축구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선수로 기억될 수 있었을까? 지난 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의 경기를 관전하기 위해서 안필드에 방문했던 펠레처럼 사람들은 던컨 에드워즈를 기억해줄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던컨 에드워즈를 축구 역사상 최고로 위대했던 선수로 생각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물음에 우리는 정확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만약 1958년 끔찍했던 뮌헨 참사에서 에드워즈가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1966년 잉글랜드의 줄리메 트로피(Jules Rimet trophy)는 바비 무어가 아닌 던컨 에드워즈가 들어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실 던컨 에드워즈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한 짧은 고증이 있을 뿐이며 흑백 화면을 통해서만 그의 플레이를 볼 수 있다. 거기에 에드워즈가 공을 잡은 순간에 한정해서만 볼 수 있다. 우리가 던컨 에드워즈에 대해서 알고 있는 내용의 절대 다수는 그와 같은 시대에서 직접 눈으로 지켜보았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존하고 있다. 바비 찰튼 경이 대표적인 인물인데 그는 던컨 에드워즈야말로 자신이 직접 목격했던 최고의 축구 선수였다고 증언한다. 물론 바비 찰튼 경말고도 던컨 에드워즈가 정말 대단한 선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주 목요일은 던컨 에드워즈가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데뷔한지 60년이 지난 날이었다. 당시 던컨 에드워즈는 18세 183일의 나이로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데뷔했으며 무척 당당한 태도로 축구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젊은 선수가 탄생했음을 전세계에 알리는 듯한 풍채를 뿜어냈다고 한다.


뮌헨 참사 사건 이후 15일만에 던컨 에드워즈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 때까지 에드워즈는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18경기를 뛰었다. 바비 찰튼 경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던컨 에드워즈의 죽음에 '위대한 던컨이 세상을 떠났다' (Big Duncan has gone) 라는 표현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던컨 에드워즈가 뮌헨 참사를 극복해 살아남았다면 얼만큼 대표팀 경기를 소화했을지에 대해서 추측을 할 수밖에 없다. 찰튼 경은 "던컨은 모든 것을 다 갖춘 선수였다. 개성이 강하며 강인한 성격이었으며 이러한 기질은 피치 위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만약 던컨이 자신의 축구 선수 커리어를 유지할 수 있었다면, 우리가 목격한 최고의 선수라는 증언을 증명해줄 업적을 남겼을 것이라 확신한다. 물론 나는 펠레, 마라도나, 베스트, (데니스) 로, (지미) 그리브스, 내가 좋아하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같이 위대한 선수들을 알고 있지만 던컨은 경기 모든 부분에서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스탠리 매튜스나 톰 피네이도 던컨 에드워즈의 재능을 갖추지는 못했다." 라고 말한다.


보는 이를 즐겁게 만드는 최초의 원더 보이였던 던컨 에드워즈의 자리를 물려받아 후세에 조지 베스트, 폴 개스코인, 라이언 긱스, 웨인 루니같은 선수들이 등장했다. 이번 칼럼을 작성하기 위해서 나는 과거의 언론 보도를 찾아보게 되었고 1953년 4월 1일 기사를 여기에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 기사는 던컨 에드워즈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군 데뷔를 며칠 앞둔 시점에서 작성된 기사였다. 내가 과거의 언론 보도를 찾아보면서 느낀 점은 그 시대의 기자들은 오늘날의 언론인들처럼 섵부른 예측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소개하고자하는 기사를 작성했던News Chronicle의 조지 팔로우 기자는 던컨 에드워즈에 대해 기사를 작성하면서 시대를 앞서간 것 같다. 아래는 그의 기사 일부이다.


"최초의 원자 폭탄의 등장처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정말이지 멋진 일을 앞두고 있다. 이들이 던컨 에드워즈라는 재능을 발견한 것은 축구계에 있어서 정말로 대단한 일이다. 이제 던컨 에드워즈는 16살에 불과한데 우리가 에드워즈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냐고? 일단 에드워즈는 소년이 아닌 사내 녀석이다. 벌써부터 신장이 5피트 10인치(178cm)다. 에드워즈의 신체 조건은 굉장히 강력한 힘이 발휘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다. 에드워즈가 공을 잡으면 연약한 소년이 발재간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대담한 돌파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에드워즈가 태클을 시도하면 마치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강도의 태클이 나온다. 게다가 던컨은 올드 트래포드의 자랑이었던 잭 로리(Jack Rowley,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통산 211골)에 버금하는 양발 슈팅 능력을 지니고 있다. 1부 리그에서 던컨 에드워즈가 언제부터 폭발력있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있는 사람은 없지만, 이것 하나 만큼은 확실하다 : 던컨 에드워즈는 사람들의 시선을 이끄는 선수가 될 것이다(It will be spectacular)."


에드워즈는 곧바로 완벽한 축구 선수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주로 미드필더로 경기를 소화했지만 어떤 포지션에서든 피치 위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뿜어냈다. 에드워즈의 국가대표 첫번째 경기는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에게 7:2로 이긴 경기였다. 데니스 윌쇼가 최초로 1경기 4골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고 냇 로프하우스가 2골을 기록했지만 헤드라인은 전적으로 에드워즈의 차지였다. 스코틀랜드의 공격수 로리 라일리는 동료 토미 도허티에게 "저런 선수는 도대체 어디서 발견한거야? 클라이드 강(스코틀랜드의 강)에 더 작고 강력해진 전투함(던컨 에드워즈)이 있잖아!" 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에드워즈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잉글랜드에서 최연소 국가대표팀 데뷔 기록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 기록은 1998년 마이클 오언에 의해서 깨지기 이전까지 유지되었고 에드워즈의 아우라 덕분인지 매트 버스비 경이 유스팀 경기에 던컨 에드워즈를 출전 시키려할 경우 상대 팀은 이미 1군에 멀쩡히 자리잡은 국제적인 실력의 선수를 유스팀 경기에 내보낸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에드워즈는 전술에 제약되지 않는 위대한 선수였을 뿐만 아니라 동나이대 선수들에 비해 탁월히 앞서있는 기량을 갖춘 선수였다. 


"던컨 에드워즈의 힘으로 상대를 이긴 경기들이 있었다. 특별히 유스컵 첼시와의 준결승 2경기가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첼시 원정에서도 올드 트래포드에서도 각각 2:1 승리를 기록했는데 4골 모두 던컨이 기록한 골이었다. 상대에도 좋은 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결코 쉬운 경기가 아니었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난 당시 코너킥을 찰 때 이렇게 생각했다. "여기서 내가 올려주면 던컨이 알아서 해결해주겠지." 정확하게 던컨이 상대팀 10명의 선수를 완벽히 따돌리고 결승골을 만들어냈다. 정말 대단한 선수였다. 오늘날의 밀집된 수비를 상대하더라도 던컨은 그들을 충분히 무력화시킬 것이다." 바비 찰튼 경은 이렇게 말하며 매트 버스비 경은 "던컨은 우리가 그를 데려왔던 16살 때부터 결코 소년이 아닌 한 명의 사내 자식이었다."라고 말했다.


던컨 에드워즈를 바라보는 버스비 경의 눈빛은 반짝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같은 애정을 느겼겠지만, 뮌헨 참사 이후 깊은 슬픔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버스비 경의 표현에 따르면 에드워즈는 "큰 경기를 좋아하는 타입의 선수, 큰 무대에서 뛰는 것을 더욱 즐기는 청년"이라고 한다. 1956년 잉글랜드가 세계 챔피언 서독을 상대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원정 경기를 떠났을 때, 에드워즈는 자신의 명성에 걸맞는 활약을 펼쳤다. 이 날 경기에서 던컨 에드워즈가 기록한 골은 걸작 그 자체였다. 25야드 거리에서 3:1 승리의 기반을 다지는 득점을 기록하기 이전에 상대 수비의 견제를 풀어내는 모습도 대단했다.


이번에는 팀의 주장인 빌리 라이트로부터의 칭찬을 소개하고자 한다. "던컨 에드워즈라는 이름은 경기를 지켜본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에드워즈는 정말로 대단한 선수였다. 오늘날에 에드워즈가 보여준 선수 개인의 퍼포먼스에 버금가는 모습을 보여줄 선수는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사자처럼 용맹하게 태클을 시도했고 모든 득점 기회에 연관 되었고 멋진 마무리로 기회를 마무리 지어냈다. 19살에 불과한 나이였음에도 던컨 에드워즈는 이미 월드 클래스 선수였다."


뮌헨 참사 이후 던컨 에드워즈가 세상을 떠나기 이전까지 던컨 에드워즈의 동료 7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에드워즈는 15일을 버텼지만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에드워즈가 15일씩이나 버틴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한다. 에드워즈는 사고로 인해 신장 기능에 손상을 입었고 폐 허탈 증세에 골반뼈 골절과 오른쪽 허벅지에 여러 골절상을 입었으며 갈비뼈 골절에 추가로 여러 내상을 당한 상태였다.


던컨 에드워즈는 의식이 절반 정도 돌아온 상태에서도 수석 코치인 지미 머피에게 토요일 주말에 있는 울버햄턴과의 경기 킥-오프 시간을 물어봤고 이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있다. 던컨 에드워즈는 지미 머피 코치에게 그 경기를 놓칠 수 없다고 간절히 뛰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프랭크 테일러의 <The Day a Team Died>라는 저서에는 '던컨 에드워즈의 죽음은 젊은 위인(young Colossus)가 한창 재능을 펼쳐야할 시기에 세상을 떠난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던컨 에드워즈의 죽음으로 우리는 수없이 많은 답이 없는 질문을 마주하게 되었다. 만약 던컨 에드워즈가 살았다면 1958년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는 어떤 성적을 낼 수 있었을까? 축구계 위인들 사이에 던컨 에드워즈가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까? 던컨 에드워즈를 향한 지미 머피의 찬사로 글의 마지막을 장식하고자 한다. "나는 항상 무하마드 알리의 '나는 위대하다!'라는 전세계를 향한 외침을 보면 미소를 머금게 된다.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바로 던컨 에드워즈라는 축구 선수이다."



출처 : http://www.theguardian.com/football/blog/2015/mar/28/duncan-edwards-original-boy-wonder-great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