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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athan Wilson


"만약 감독이 바뀐다면?", "감독이 어느 시점에 바뀌는가?"의 질문에서 벗어난지는 한참 지났다. 지금 관심이 있는 것은 누가 다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이 되느냐이다. 지난 월요일에 있었던 슈루즈버리와의 FA컵 경기는 반 할의 올드 트래포드 임기를 끝내버릴 수도 있는 경기였다. 어쩌면 미트윌란과의 유로파 리그 경기에서 탈락한다면 그것도 또 하나의 사임의 시점이 될 수 있다. 지금 어느 누구도 다음 시즌에 반 할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직을 유지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체면치레를 할 수 있는 대회인 FA컵과 유로파 리그가 있지만 유나이티드가 그 대회를 병행함과 동시에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이 달려있는 리그 4위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알렉스 퍼거슨 경의 은퇴 이후로 벌써 3번째 수치스러운 시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축구판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오랫동안 머무른 리더를 곧바로 성공리에 대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이런 패턴을 겪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1910년 올드 트래포드 개장 이후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리그 타이틀 관점에서 가장 성공적인 잉글랜드 클럽이자 동시에 라이벌들보다 재정적으로 상당한 이점들을 누려왔었다. 그러나 주목할 부분은 1910년 이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차지한 19번의 우승 모두가 단지 3명의 감독 아래서만 이루어낸 성과라는 점이다.


1910년 이후의 모든 리그 영광이 단 3명의 감독에게서 나온 것, 이것은 일반적인 축구계 문화에서 익숙치 않은 그림이다. 감독에게 이토록 큰 힘이 주어지는 곳, 클럽의 철학을 넘어 자신의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곳은 축구계에 그리 많지가 않다. 스완지 시티가 최근 부상하게 된 것도 권력이 감독에게서 다른 곳으로 이양되었기 때문이다. 감독은 훨씬 더 좋은 제안에 이끌려 팀을 떠날 수도 있고 실패한 것으로 인식되어 팀을 떠날 수 있다. 그러나 팀의 권력이 감독에게서 다른 곳으로 이양되면 클럽은 대격변 없이 감독 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브리티쉬 문화는 감독만의 왕조를 건설하는 것에 대해 열망하는 모습이다. 모든 감독이 자기 클럽의 빌 샹클리, 맷 버스비, 돈 레비가 되어주길 바란다. 심지어 조세 무리뉴조차 첼시 감독으로 2번째 부임할 때 10년 계획에 대해서 언급했었다. 팀에 충성하는 젊은 홈그로운 선수들 무리, 또한 그들과 클럽이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 서로가 완벽하게 상호 이해를 하는 것, 거기에 추가가되는 영입은 언제나 클럽 운영의 이상향으로 여겨지고 있다. 실제로 그런 조화가 이루어지면 결과물은 정말 환상적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맷 버스비 경과 알렉스 퍼거슨 경 아래서 그런 경험을 했고 현재는 바이에른 뮌헨과 바르셀로나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쟁점은 그 영광의 순간 다음이다. 팀에 하나의 체계를 다져놓은 리더가 떠나면, 그 시스템도 사라지고 그 때부터 발생하는 사건들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다.



사례 : 맷 버스비 이후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68년 유러피언컵 우승 이후 이들이 더 할 수 있는게 있었을까? 자신의 3번째 위대한 팀을 이끈 버스비 경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이룰 수 있는 위대한 상은 모조리 수집했다. 유러피언컵을 최초로 우승한 잉글랜드 팀이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고 바로 10년 전 뮌헨에서의 비극이 있었기에 이는 더욱 두드러진 성과였다. 1969년 1월에 버스비 경은 은퇴 의사를 밝혔는데 이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59세였다. 그러나 그는 24년째 감독직을 이어오고 있었고 뮌헨에서의 트라우마는 계속해서 그를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버스비 경은 자신이 일종의 풋볼 디렉터로 존재하면서 그 밑에 감독을 두는 것을 구상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선택한 후계자는 윌프 맥기네스였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스팀 출신이며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 이후에 유스팀 코치를 담당하는 인물이었다. 맥기네스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첫시즌을 리그 8위로 마감했고 리그컵과 FA컵에서는 모두 준결승까지 진출했다. 


다음 시즌부터 조지 베스트는 점차 축구에 집중하지 못했다. 리그컵 준결승에서는 디비전3에 소속되어 있는 아스톤 빌라에게 패배했고 리그에서의 경기력은 형편없었다. 시티와 아스날에게 연패를 당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8위란 성적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드레싱룸에선 감독에 대한 반발, 파벌 형성에 대한 루머들이 있었으며 맥기네스는 다시 자신의 본래 직위였던 리저브팀 감독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약 2주 후에 그는 완전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났다.


맥기네스의 자리를 물려받은 인물은 바로 버스비 경이었고 유나이티드는 시즌을 8위로 마감했다. "유감스럽게도 모든 선수들이 윌프의 지시를 따르려하진 않았습니다. 모두가 윌프를 위해서 100% 헌신하진 않았던 것이죠. 우리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버스비 경이 다시 무대로 복귀하니까 모든 것이 단번에 달라졌습니다." 데이빗 새들러가 이렇게 말했었다.


맥기네스의 문제 중 하나는 역할에 대한 경계의 애매모호함 때문이었다. 버스비 경의 주장에 따르면, 맥기네스는 선수들과 '과도하게' 친밀했다고 한다. 그러나 버스비 경이 이사진으로 클럽에 여전히 존재하는 마당에 맥기네스가 감독으로서의 자신만의 권리를 정립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적 작업에서의 마지막 입김을 행사하고 일부 1군 선수 무리들과는 골프를 치는 관계까지 유지했던 버스비 경의 존재는 맥기네스만의 지위 확립에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1971년 여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레스터 시티의 감독인 프랭크 오파렐을 임명하는데 그는 버스비 경이 여전히 차지하고 있는 올드 트래포드의 감독 사무실을 자신에게 넘겨야한다고 주장했다. 베스트가 커리어 황혼을 태우는 시기였고 유나이티드는 시즌 첫 20경기에서 14승을 거두었으며 고작 2패만을 기록했다. 크리스마스 기간에 3경기 연속으로 무승부를 기록했으나 12월을 리그 1위로 마감했었다. 그러나 새해 첫날부터 웨스트 햄에게 0:3으로 패배하더니 역사상 처음으로 7경기 연속 패배까지 기록해 시즌을 8위로 마감했다. 이번에도 베스트는 다시 일탈하기 시작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형편없는 흐름은 새로운 시즌에도 이어졋고 개막 후 리그 12경기에서 고작 1승을 거두는데 그쳤다. 오파렐은 버스비 경이 특정 선수 이적을 (알렉스 스텝니, 윌리 모건) 방해했다고 주장했고 그와 버스비 경의 관계는 깨져버렸다.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10월에 토트넘에게 1:4로 패배한 이후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연례 행사에서 과음한 버스비 경이 오파렐의 아내에게 오파렐을 '자립심만 강한 골칫덩어리'라 표현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다가오는 월요일에 오파렐은 버스비 경에게 정확히 어떤 의미를 담아 이야기한 것인가에 대해서 물었는데 이에 버스비 경은 바비 찰튼이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 되어선 안되며 (오파렐이 영입한) 마친 부찬은 형편없는 플레이를 선보인다고 전했다. 오파렐 입장에서는 버스비 경이 팀에 과도하게 참견하고 있다고 느낄만 했다.


12월에 리그 꼴찌인 크리스탈 팰리스에게 0:5로 패배하면서 오파렐의 임기도 그렇게 종료되었다. 오파렐의 자리는 토미 도허티에게 넘어갔는데 팀은 1974년 2부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승격에 성공하며 1977년에는 FA컵 우승을 차지한다. 그러나 도허티는 그해 여름 클럽의 물리치료사 아내와의 불륜이 발각되면서 경질되고 만다.


버스비 경은 언제나 자신의 직접적인 간섭이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서 부인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버스비 경의 존재가 후임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느낀다. 1973년 클럽에서 완전히 떠나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버스비 경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이 자리를 떠날 수 있겠습니까. 전쟁의 폐허 후 잿더미 속에서 내가 일으켜세운 클럽, 뮌헨에서의 비극 이후에 내가 다시 만들어낸 클럽에서 내가 스스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라는 말입니까?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클럽이자 이 클럽을 위해서 나를 던지며 살아왔다고도 할 수 있는 내가 어떻게 떠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버스비 경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나는 것은 불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팀에게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한편 1974년 은퇴를 선언한 빌 샹클리가 훈련장에 오지 못하도록 조치한 리버풀의 상반된 대처는 유익한 결과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사례 : 발레리 로바노프스키 이후의 디나모





퍼거슨 경과 가장 유사한 인물을 뽑자면 바로 1973년부터 생을 마감한 2002년까지 디나모 키예프를 이끌었던 발레리 로바노프스키를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2번의 휴식 기간이 (1982~1984 & 1990~1997) 있었으나 그는 굉장히 성공적인 감독이었다. 12번의 리그 타이틀, 9번의 컵 대회 우승, 2차례의 컵-위너스 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소비에트 스타일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을만한 강한 압박 스타일을 정립했다. 그런 사람의 뒤를 잇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현재 디나모 키예프를 이끌고 있는 세르히 레브로프는 포스트-로바노프스키를 찾는 디나모의 침체기를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인물로 거론되고 있는데 그는 로바노프스키 이후 디나모가 임명한 8번째 감독이다. 디나모는 팀의 연속성을 이어가기 위해서 로바노프스키 감독 이후에 그의 아래서 직접 뛰었고 코치까지 지냈던 Oleksiy Mykhaylychenko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2004년 챔피언스 리그 3차 예선에서 트라브존스포르에게 홈에서 1:2로 패배하며 경질되기 이전까지 2차례의 리그 우승과 1번의 컵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그 경기 이후 디나모의 회장 이호르 수르키스는 이렇게 말했다. "(경질해야할 이유는) 분명해졌다. 디나모의 발전과 그 과정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몇가지 것들이 발견되었다. 나는 선수들의 신체적 피로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의 심리적인 부분, 기강에 있다. 우리는 트라브존스포르전에서 그것이 약화되어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지난해 경기장에서 80,000명의 팬들이 아스날에게 승리를 거둔 것에 대해서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망신살 뻗치는 경기를 펼쳤다!"


디나모는 로바노프스키 아래서 뛰었던 선수들에게 의존했다. 그럴만한 것이 로바노프스키 밑에서 뛰는 선수가 아니었다면, 당시 우크라이나 축구계에선 그리 명망있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샤흐타르 도네츠크의 성장과 디나모의 과도기를 겹치며 디나모는 4년의 시간동안 단 1차례의 리그 타이틀만 성취해냈다. 과거 디나모가 우크라이나를 평정했던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건 생각조차 못할 일이다.


디나모의 경기장 벤치에 왔던 모든 사람들에겐 '발레리 로바노프스키'란 수식어가 붙었고 결국에는 로바노프스키에 대해 계속해서 기억하는 것이 경기에 대한 온전한 집중을 못하게 방해한다는걸 인지 못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조제프 자보는 위기의 순간에 본인이 "이 위기의 상황에서 발레리 로바노프스키라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까지 생각해봤다는걸 인정했다. 그러나 로바노프스키의 가장 큰 장점은 계속해서 발전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것이 로바노프스키의 진정한 장점이었고 그렇게해서 약 30년간 최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던 것이다. 핀트를 잘못잡은 것이다. 


그래서 2007년 12월에 디나모는 결국 로바노프스키의 제자 내에서 감독자리를 구하는 것 대신에 외부인을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데려온 인물은 모스크바 출신이자 직접적으로 로바노프스키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유리 세민이다. 그는 처음으로 온전히 지휘봉을 잡았던 시즌에 바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친정팀 로코모티브의 제안을 받고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그 이후 또 다른 러시아인 발레리 가자예프가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 이후 클럽은 로바노프스키의 제자인 Alyaksandr Khatskevich에게 임시 감독을 맡겼고 또 다시 Mykhaylychenko가 다시 임시로 1달을 대신했다. 결국 디나모가 정식 감독으로 선택한 인물은 다시 로바노프스키의 제자인 올레흐 블로힌이었다.


블로힌은 아주 이상적인 로바노프스키 스타일의 선수였다. 디나모의 공격수로 19년을 보냈던 그는 로바노프스키 방식에 아주 철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블로힌은 고집스럽고 완고하며 아주 성공적이지 못한 감독으로 기억되며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2014년 4월, 18개월만에 그는 유감스럽게도 자리에서 물러나야했다.


디나모는 클럽 내부에서도, 클럽 외부에서도 로바노프스키의 성공을 이어갈 재목을 찾았으나 두가지 모두 로바노프스키 아래서 디나모 키예프가 경험한 성공을 유지하지 못했다. 현재 디나모를 이끌고 있는 감독은 로바노프스키의 3번째 위대한 팀, 1999년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전까지 진출한 팀의 키플레이었던 레브로프이다. 그러나 레브로프는 잉글랜드, 터키, 러시아에서도 선수 생활을 했었던 인물이다. 물론 블로힌의 코치로 일했으나 그의 철학은 우크라이나에만 머물러있지 않았으며 위르겐 클롭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많이 닮으려고 노력 중이다. 처음 지휘봉을 잡자마자 리그에서 우승을 했고 유럽 무대에서 보여주고 있는 퍼포먼스는 디나모가 정말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발생한 갈등으로 인해 샤흐타르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할 점이다)



전임자 영향력에 대한 우려


두가지 사례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문제점은 권위자의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존재감이었다. 버스비 경의 케이스는 아주 직접적인 경우였고 로바노프스키 같은 경우는 클럽이 과도하게 그 부분을 (전임자의 성과를 이어가야만 한다는 것) 인식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맥기네스와 오파렐이 시도한 모든 결정들은 버스비의 시각에서 재해석 되었다 : 두 감독의 결정이 버스비 경과 같은 노선을 달리고 있는가? 아니면 두 감독이 버스비 경에게 반기를 들고 있는가? 잇따른 디나모 키예프 감독들의 실패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감독에게는 기존 로바노프스키가 마련해놓은 하나의 진실된 길에서 벗어났을 때 발생하는 실패에 대해서 설명할 준비가 필요했다. 결국 새로운 감독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시행하지 못했고 과거 로바노프스키가 옳다고 생각한 것들에 대해서만 집중하게 되었다.


오파렐은 특정 선수를 처리하고 싶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버스비 경과 사적인 자리에서 골프를 즐기는 사이었다. 그런 경우는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게 된다. 현재 루이 반 할 같은 경우는 관중석에서 경기를 바라보는 알렉스 퍼거슨 경의 시선에 결코 주눅들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데이빗 모예스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리버풀이 자리에서 물러난 샹클리를 (훈련장에 오지 못하도록) 모질게 대한 것도 지금 회상하기에는 굉장히 매정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클럽 입장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리버풀의 부츠룸 (1960대부터 1990년 초반까지 안필드에 있는 공간으로 코칭 스태프의 회의가 있던 곳) 전통은 리버풀 감독직 자리의 왕관이 잘 인수될 수 있도록 도와준 하나의 시스템 구조가 되었다. 샹클리에서 밥 페이즐리로, 페이즐리에서 조 페이건으로 넘어가는 흐름은 대중의 환호에 관심이 없는 페이즐리의 존재감 덕분에 더 성공적이었다. 



권력의 공백


전제 군주의 배경에 무엇이 있었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다. 그의 존재를 무엇으로 대체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권력의 공백기에 새로운 세력이 떠오르게 되고 그 결과 맥기네스와 오파렐이 겪었던 것처럼 작은 규모의 혼란이 찾아올 수 있다. 어쩌면 더 심각한 규율 혼란이 올 수도 있다. 역사는 절대자가 물러나면 수많은 내전이 발생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현재 이러한 위험 속에 존재하고 있다. 특히 알렉스 퍼거슨 경이 물러날 당시 데이빗 길 단장 마저도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 더욱 그런 현상을 발생하게 만들었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팀은 아주 분명하게 두갈래로 갈라졌다 : 상업적인 부분에 더 신경을 쓰는 이사진이자 동시에 클럽에 새롭게 소개된 인물들 vs 연세가 있는 오로지 축구에 관련된 인물들, 특히 Class of 92 세대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분들


에드 우드워드는 전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고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부조화스런 스쿼드를 갖추도록 초래한 산만한 영입 정책을 총괄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빅네임을 영입해야 한다고 꾸준히 이야기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팀을 부유하게 만들겠다는 것에 기인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조세 무리뉴 선임에 대해서 긍정적인 인물들로 맨체스터 시티의 펩 과르디올라 부임 발표에 대해 슈퍼스타 (조세 무리뉴) 로 대응하는 것을 생각한다. 조세 무리뉴의 기록은 굉장히 단기적인 성공에 치우쳐있음에도 말이다.


그와 반대점에 존재하는 축구에 관련된 인물들은 논란을 끊임없이 제조하는 감독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이 되길 원치 않는다. 또한 그들은 무리뉴가 계속해서 떠나면서 남겼던 것들, 정신적으로 선수들이 지치는 것들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다. 무리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날 때 그런 상황이 반복되는 것에 대해 우려한다.


그러나 무리뉴 선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따로 있다. 무리뉴 부임은 클럽의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에 대한 해결이 될 수 없어 보인다. 앞으로 추가적인 비용이 지출되는 영입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에이전트들에게나 좋은 소식이지 클럽의 일관성 부분에 대해서는 결코 좋은 소식이라 할 수 없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2차례 황금기에 그 기반이 되었던 유스 시스템은 글레이져 가문의 인수 이후로 다소 방치된 부분이 있다. 1986년 론 앳킨슨의 자리를 이어받은 알렉스 퍼거슨 경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스 시스템 구조를 소생시켰으나 현재 유력한 감독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조세 무리뉴는 과거 행적을 보았을 때, 그것을 재현하기 어려운 인물로 보인다.


부유한 클럽은 트로피를 향한 길을 언제나 돈으로 살 수 있다. 그러나 그 성공을 유지하는 것은 단순한 돈 이상의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70년대와 80년대의 리버풀은 어떻게 다음 감독에게 권력을 이동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적절한 예시 모델이 될 수 있다. 전통을 깨는 것도 긍정적인 면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 1987년 케니 달글리시의 존 반스, 피터 비어즐리, 레이 휴튼 영입은 리버풀의 전통적인 영입 모델에서 벗어난 경우지만, 1987/1988시즌 리버풀은 짜릿한 축구를 선보였다.


어쩌면 그 때의 위대한 팀이 마지막 꽃봉우리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3명의 주요 선수를 영입하고 보다 창조적인 경기를 펼친 것은 리버풀에게 필요한 변화였다. 힐스보로 참사와 그로인한 후유증이 클럽을 덮어오기 시작했고 충격에 빠진 달글리시는 리버풀 감독직을 사임하게 된다. 자연스럽게도 리버풀은 내적인 부분에 신경을 쓰게되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처럼 프리미어 리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상업적 가능성에서 이점을 누리지 못했다.


레브로프가 디나모 키예프의 영광을 되찾고 있다고 주장하기엔 아직 시기가 이르다. 그러나 레브로프는 분명히 합리적인 모델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로바노프스키의 원칙은 여전히 디나모 키예프란 클럽의 원칙으로 남아있고 레브로프는 그런 로바노프스키의 위대함에 대해서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레브로프는 로바노프스키의 신조에 결코 구속받지 않는다. 그는 디나모가 과거에 성공했던 방식에 집착하지 않으며 진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새로운 정보와 아이디어는 기존 디나모의 것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착안하려고 한다. 레브로프는 다른 감독들처럼 위대한 로바노프스키의 그림자 밑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로바노프스키의 철학을 기반으로 한 상황에서 새로운 답을 찾으려 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우려해야할 것은 디나모 키예프가 이 해답을 찾는데까지 14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출처 : http://www.theguardian.com/football/blog/2016/feb/25/manchester-united-and-the-problem-of-moving-on-from-an-all-powerful-lea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