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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팀은 왜 종말을 맞이하는가

The Question 2016. 11. 21. 20:45 Posted by Seolskjaer





by Jonathan Wilson


펩 과르디올라와 바르셀로나의 마지막 시즌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음에도 그 운명을 피하지 못한 그리스 비극과 유사하다.


축구는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걸 끊임없이 상기하게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젊고 유망한 유망주는 어느새 노장이 되는데 그 시간은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기까지 정도의 시간에 불과하다. 축구의 삶은 실제 삶보다 속도가 빠르다. 그리고 이것은 위대한 선수들보다 위대한 팀들에게 더 잘 어울리는 말이다 : 그들은 솟아오르고 빛을 깜빡이며 트로피를 성취해낸다. 그리고 빛을 잃는다. 하강의 속도는 상승의 속도보다 더 빠르며 우리는 이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 


빛을 내고 있는 것들이 언젠가는 사그라드는 것. 이것이 펩 과르디올라의 뇌리 속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바르셀로나만의 멋진 축구로 전세계 사람들을 감탄하게 했으며 경기를 지배했고 상대를 파괴했다. 그리고 3년의 시간동안 전례없는 수준으로 트로피를 싹쓸었다. 하지만 과르디올라는 그 순간을 즐기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다음에는 무엇이 다가오는가에 대해 걱정하는 듯 보였고 바르셀로나 축구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고민에 빠진 듯해 보였다. 과르디올라의 근심은 점점 줄어들어가는 그의 머리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헝가리 출신의 벨라 구트만의 "3번째 해는 피할 수 없다.(The third year is fatal)" 란 발언은 일반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강한 압박을 구사하는 팀에게 3년은 그 위대한 팀이 지속될 수 있는 수명의 최대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보편적인 진리일 뿐이다. 서로 각기 다른 특별한 이유로 위대한 팀들이 사라져갔다.



이 세상의 영광는 이처럼 사라져간다(Sic transit gloria mundi)


위대한 팀이 사라지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선수들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다. 1956년부터 1960년까지 5차례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하며 위대한 반열에 올라선 레알 마드리드가 바로 이 케이스이다. (레알 마드리드는 감독을 교체하면서 구트만이 주장한 3년 법칙을 피해갈 수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가 당시 유럽에서 최고의 선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에는 '부(wealth)'가 큰 역할을 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유럽 재패 이후에도 레알 마드리드는 1961년부터 1965년까지 5연속으로 리그 타이틀을 획득에 성공했다.1964년 레알 마드리드는 엘레니오 에레라가 이끄는 인터나치오날레와 유러피언컵 결승전 경기를 치렀는데 당시 레알 마드리드에는 37살 프렌츠 푸스카스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34살 호세 산타마리아, 31살 파코 헨토가 있었다.


리즈 유나이티드도 마찬가지였다. 1974년 돈 레비가 떠났는데 이후 브라이언 클러프와 지미 암필드 역시 나이를 먹은 선수단으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빌 샹클리는 은퇴 전에 위대한 리버풀을 건설하고 떠날 수 있었지만, 처음에는 샹클리 마저도 나이먹은 선수들로 할 수 있는게 없었다. 팀의 과도기를 매니징할 수 있는 것은 밥 페이즐리, 알렉스 퍼거슨, 발레리 로바노브스키처럼 한 구단에서 오랫동안 머무른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능력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당시 레알의 문제를 오로지 선수단 고령화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들은 분명히 시대에 뒤떨어진 전술을 구사하는 팀이었다. (레알이 유럽을 재패한 이후로도) 전술은 끊임없이 진화했으며 인터나치오날레의 맨마킹 전술은 헨토와 푸스카스를 질식시켰다.



친애하는 소년이여, 사건이다 사건!


때로는 외부 사건이 개입하여 문제를 야기한다. 디나모 키예프는 빅토르 마슬로프와 함께 소비에트 챔피언십에서 3연속 우승했다. 그런데 1966년 월드컵에 1군 선수들이 다수 차출되는 바람에 마슬로프는 유스에서 선수를 끌어올려야만 했다. (소련 당국이 월드컵 기간이라고 리그를 중단하기엔 너무나 고집이 쎈 인물들이었다.) 1970년에도 1966년과 마찬가지였고 이번에는 성적이 더 안좋았다. 기본적으로 새로운 선수들이 1966년 세대만큼 기량적으로 우수하지 않았다. 더 비극적인 사건은 1991년에 있었다. 츠베르나 즈베즈다(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의 세대는 내전이 발생하여 시작조차 하지 못한채 와해되었다.


90년대 초 리버풀도 이야기할 수 있다. 백패스 금지 조항은 리버풀에게 치명타였다. 당시 리버풀에겐 골키퍼에게 공을 보내 안정적으로 공을 소유하는 것이 경기 지배에 대한 핵심적인 요소였다. 마찬가지로 노팅엄 포레스트 역시 백패스 금지 조항이 생긴 첫시즌에 강등을 당했다. 물론 노팅엄 포레스트 강등의 주된 원인은 늙은 브라이언 클러프가 더 이상 변화에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프리미어 리그라는 새로운 환경은 구단에게 이전과는 다른 상업성을 요구했고 당시 리버풀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이토록 빠르게 뒤쳐질 이유는 결코 없어보였다. 힐스보로 참사가 없었더라면 리버풀 구단은 슬픔과 분노에 빠져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며 케니 달글리시가 리버풀을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즉 힐스보로 참사가 없었다면, 리버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도전에 조금 더 착실한 대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극적인 사건도 위대한 팀의 종말을 불러온다. 토리노의 수페르가 비극,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뮌헨 참사같은 케이스가 있다. 하지만 그건 특수한 경우다. 구단의 확고하고 급진적인 철학이 있다면, 그 구단은 자신들의 컬러를 지나칠 정도로 더욱 확고히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몰고간다. 그들을 망가뜨리는 핵심적인 원인은 노쇠화와 외부 환경이 아니다.



자기희생의 부정적 결과


1967년 4월 엘레니오 에레라의 인테르는 유벤투스보다 승점 4점 앞서고 있었다. 또한 유러피언컵 8강에서는 레알 마드리드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그들은 빠르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유러피언컵 4강에서 CSKA 소피아와 두차례 1-1 무승부를 기록한 인테르는 플레이오프를 치러야만 했다. 인테르는 볼로냐에서 경기를 개최하는 조건으로 입장수입의 3/4를 CSKA 소피아에게 주기로 약속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인테르는 1-0 승리를 거두었으나 문제가 전혀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인테르의 수비적인 경기 접근법에 대한 모든 의구심들이, 자신들만의 강점을 극대화시키기보다 상대의 강점을 최소화시키는 인테르 전술이 급격히 문제화되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인테르는 라치오, 칼리아리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했고 유벤투스에게는 1-0으로 패배했다. 이제 유벤투스와의 승점은 2점으로 줄어들었다. 인테르는 또 다시 나폴리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유벤투스도 무승부를 기록했다. 피오렌티나와의 홈경기에서 또 비겼고 유벤투스는 이번에는 승점차를 좁혔다. 인테르의 시즌이 종료되기까지는 2경기가 남았다. 리스본에서의 유러피언컵 결승전과 리그 만토바 원정에서 2승을 거두면 인테르는 더블을 달성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팀의 모멘텀은 결코 좋지 않았다.

 

레알 마드리드가 새로운 감독직에 에레라 선임을 고려하고 있다는 점은 인테르의 보드진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산드로 마쫄라는 독감으로 한바탕 고생을 겪었고 루이스 수아레즈는 허벅지 부상을 당했다. 인테르는 선수들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것들로부터 떼어내고자 강제로 투숙을 시행했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라이트백 타르치시오 부르니치는 "압박감만 커져갔다. 우리게엔 탈출구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 강제로 합숙을 진행한 것은 리그와 유러피언컵 결승전을 앞둔 팀 붕괴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라고 회상한다. 


리스본에서는 그런 규제들이 훨씬 더 심해졌다. 인테르는 리스본에서 30분 거리 떨어진 해안가에 호텔을 잡았다. "우리는 코치들과 호텔 직원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3일동안 단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다. 일반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미쳐버릴께 분명하다. 수년간 우리는 이런 방식을 경험했고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 때 우리는 버티는 한계치에 도달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짊어지고 있었는데 그 부담감을 해소할 곳은 전혀 없었다. 선수들은 잠도 설쳤고 운이 좋아야 3시간 가량 잘 수 있었다. 우리는 경기 준비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나와 지아친토 파체티는 늦은 밤에도 주장 아르만도 피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경기 당일 아침 4명의 선수가 구토증세를 보였고 또 다른 4명의 선수가 피치로 나가기 전에 드레싱룸에서 구토증세를 호소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 자멸했다." 라고 부르니치가 말했다.


인테르 선수들의 신체만큼 감정, 정신력 모두 지칠 때로 지쳐있었다. 셀틱의 공격 흐름은 끊이질 않았다. 인테르는 초반 페널티킥을 획득했지만 셀틱의 끊임없는 공격에 굴복해 2-1로 패배했다. 이제 리그 최종전이 남았다. 유벤투스는 라치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인테르의 골키퍼 지울리아노 사르티는 前 인테르 선수인 베니아미노 디 지아코모에게 단 1차례 슈팅을 허용했지만 그 공이 미끄러져 골문으로 들어가버렸다. 만토바가 1-0으로 승리했고 인테르는 스쿠테토마저 놓쳐버렸다. 인테르를 최강의 자리로 올려놓았던 집중, 규율, 조심성이 끝내 인테르를 궤멸시켜버렸다.



썩어가는 열매와 시들어가는 꽃


지금부터 이어갈 이야기도 인테르의 스토리와 똑같다. 구단을 위대한 길로 인도했던 방식을 너무 지나치게 시행한 결과 파멸을 맞이한다. 셀틱은 인테르를 제압하면서 모든 선수들이 공격함으로써 모든 선수들이 수비하는 것을 이길 수 있다고 증명했다. 이것이 아약스와 토탓 풋볼의 선구자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토탓 풋볼을 공격적인 시스템으로 간주하지만, 이것은 주도적으로 경기를 풀어가는 최선의 방식이다. 아약스는 1972년과 1973년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카테나치오를 시행하는 이탈리아 클럽을 상대로 승리했고 아약스는 공의 소유권을 되찾아오는 것을 중심으로 수비를 시행했다. 이 때의 아약스는 리누스 미헬스의 축구보다 규율이 풀려있는 축구였다. 


1966/1967시즌 아약스는 유러피언컵 8강에서 스파르타 프라하에게 패배하여 탈락했고 미헬스는 수비에 손을 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파르티잔에서 전투적인 리베로 벨리보르 바소비치를 영입한다. 바소비치는 자신이 아약스에 "터프함, 규율, 위닝 멘탈리티"를 심을 수 있다고 단언했다. 바소비치는 31세에 천식으로 선수 생활을 그만둬야했고 1971년 유러피언컵 우승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이 때 미헬스도 바르셀로나에 합류한다.


바소비치의 자리는 바소비치보다 더 공격적인 호르스트 블랑겐부르그가 대체한다. 미헬스의 자리는 루마니아의 스테판 코바치가 대체하는데 코바치는 아약스가 유지하고 있던 여러 브레이크를 풀어버렸다. 이 때 아약스는 구단 역사상 가장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했다. 미드필더 게리 뮈렌은 이렇게 말한다. "코바치는 좋은 감독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다. 미헬스는 코바치보다 더 프로다웠고 엄격했으며 모든 선수들을 동등하게 대우했다. 코바치와 함께했던 첫시즌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좋은 플레이를 펼쳤다. 왜냐면 당시 아약스는 정말 우수한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었고 우리에게 충분한 자율성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팀의 규율이 사라지자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우리에겐 이전만큼의 정신력이 없었고 하나로 뭉칠 수 있다면 우리는 계속 유럽 챔피언 자리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


인테르가 지나친 규제로 무너졌다면, 아약스는 지나치게 자유로웠다. 감독의 임무는 정원을 가꾸는 것과 유사하다. 열매가 즙이 많아지고 단맛을 낼 때, 꽃이 가장 화려하게 폈을 때, 그 때부터 부패가 시작된다. 감독의 임무는 꽃이 최대한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도록 태양으로부터 식물을 보호하는 것이다.



캄프 누의 오이디푸스


펩 과르디올라의 행보가 흥미로운 것은 그가 구트만이 주장한 '3년 법칙'을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과르디올라의 마지막 시즌은 그리스 비극과 같았다 :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던 영웅도 결코 그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과르디올라는 공격의 다양성을 위해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를 영입했는데 빠른 시일 내에 다시 그를 처분해야만 했다. 이브라히모비치의 강한 개성은 팀을 와해시킬 수도 있었다. 아리고 사키의 밀란이 침체기에 그러했듯이, 과르디올라 마음 속에서 진부하고 반복적인 방법으로 승리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이 생겼을 수도 있다. 


그래서 변화를 주기위해 과르디올라는 백3를 선택했다. 12월 베르나베우에서 바르셀로나가 3-1 승리를 거뒀을 때, 바르셀로나의 백3 시스템은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때조차도 과르디올라가 일을 너무 복잡하게 진행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의구심이 있었다. 과르디올라는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화를 시도했지만 그것은 점점 과르디올라를 옭아맸다. 과르디올라는 바르셀로나의 공격이 뻔해지는 것을 우려했고 상대팀이 바르샤를 상대로 내려앉아 싸우는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과르디올라는 공격 라인에 더 많은 선수를 배치했고 특히 다니 알베스를 높은 위치에서 적극 활용했다. 상대의 두터운 수비를 측면에서의 공격으로 돌파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것은 바르셀로나를 점차 더 예측가능한 팀으로 만들어버렸다. 후방에서 뛰어들어오는 선수보다 애초에 전방에서 머무르는 선수를 더 막기 쉽지 않은가. 


이것만으로 바르셀로나가 첼시와의 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 경기에서 무기력했던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바르셀로나가 예전만큼 상대의 수비진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이미 상대의 박스 가까이에 바르샤 선수들이 들어가있기 때문에 공을 가진 상황에서 질주하며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마지막을 고려하고 있던 과르디올라가 운명론적 이상주의를 택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과르디올라는 자신이 지도하는 바르샤가 다른 어떤 바르샤보다 가장 바르셀로나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의 바르샤가 끝나가는 시점에서도 말이다. 과르디올라는 수비수를 점차 줄여나갔다. 때로는 피라미드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과르디올라의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작품은 오이디푸스왕 일 것이다. 오이디푸스도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운명을 벗어나려는 과정 속에서 운명을 따르게 된다.


과르디올라는 바르셀로나의 붕괴를 끝까지 막으려했으며 그들의 철학이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과르디올라는 바르샤를 위대하게 만들었던 것들을 강화하면서 바르셀로나의 운명적인 몰락을 늦추고자 했다. 극도로 점유율을 높였고 더 많은 선수를 전진시켰다. 하지만 과르디올라는 실패했다. 하지만 적어도 과르디올라만의 방식대로 실패했다.


1980년 노팅엄 포레스트가 마드리드에서 함부르크를 꺾고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했을 때, 던컨 해밀턴이 노팅엄 포레스트의 수석코치 피터 테일러를 보면새 깨달았던 위대한 진리를 다시금 느끼게 된다 :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모든 팀들은 그 순간 동시에 몰락의 싹을 틔우고 있다. 영광은 몰락의 시작과 함께 다가온다.



 출처 : https://www.theguardian.com/sport/blog/2012/may/02/the-question-great-teams-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