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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athan Wilson


브라질 사람들은 1982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에게 패배한 것이 위대한 플레이 스타일에 사망선고를 내렸다고 주장하지만, 이탈리아의 승리는 '시스템'이 몰락하고 있는 방식의 축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을 의미한다. (원문은 2012년 7월 25일에 작성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2년 7월 5일, 지쿠는 경기가 끝나고 '오늘 축구는 죽었다' 라고 말했다. 바르셀로나에서 텔레 산타나의 위풍당당한 브라질은 이탈리아에게 패했고 월드컵에서 탈락했다. 당시 브라질은 과거의 브라질 스타일, 즉 1958년부터 1970년까지 월드컵 3연패를 기록했었던 시기의 유동적인 공격쪽에서의 움직임을 바탕으로하는 축구를 구사했다.

 

브라질이 자유로운 축구를 구사했다고 하지만 완전히 무질서한 스타일의 축구는 아니었다. 1970년의 브라질 대표팀은 상대팀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했고 상당한 밸런스를 맞춘 팀이었다. 오른쪽 풀백인 카를로스 알베르토의 오버래핑이 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왼쪽 풀백인 에베랄도가 상당히 수비적인 선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카를로스 알베르토가 전진하면 팀 수비는 스리백으로 전환되었다. 자일지뉴는 대회 매 경기마다 안쪽으로 파고드는 모습을 보였고 카를로스 알베르토는 앞으로 전진해 자일지뉴의 빈 자리를 채웠다. 펠레와 토스탕은 미드필드 지역까지 깊숙히 내려오면서 공간을 창출해냈다. 클로드알도는 포백 앞에서 공을 따내는 역할을 수행했고 제르송은 클로드알도 옆에서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수행했다. 후방에 위치한 에베랄도가 수비쪽에서 탄탄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왼쪽에 배치된 히벨리누는 전형적인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수행했다. 

 

1970년의 브라질은 축구를 좀 하는 11명의 사내들을 단순히 모아둔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이들을 맞물리게 만드는 세련된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지만 1970년의 브라질에는 1974년과 1978년에는 볼 수 없었던 플레이의 자유로움과 유동성이 있었다. 1982년 월드컵을 앞두고 브라질은 다시 자신들의 예전 스타일로 돌아갔다 : 리드미컬한 미드필더,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속도,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플레이


토니뇨 세레조의 징계로 소련전에 출전했던 팔캉은 인상적인 경기를 펼치면서 세레조의 복귀 이후에도 주전 미드필더 자리를 차지했다. 지쿠와 소크라테스까지 있던 브라질은 4명의 미드필더를 모두 창조적인 선수로 채웠다. 세레조와 팔캉은 모두 레지스타였고 그 앞에서 뛰는 지쿠와 소크라테스는 트레콰르티스타였다. 에데르는 보조 공격수로 육중한 덩치를 보유한 세르지뉴 근처에서 뛰었다. 세르지뉴의 피지컬은 동료 선수들에게 공간을 만들어주는데 아주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브라질의 포메이션은 중앙에 아주 강력한 기둥을 세운 것과 같은 4-2-2-2였고 측면은 풀백인 레안드로와 주니오르의 몫이었다. 일반적인 유럽 팀이라면 브라질의 포메이션을 두고 측면에 약점이 있다고 말하겠지만, 브라질은 엄청난 유기성과 볼다루는 재주로 부족함을 충분히 채웠다. 

 

브라질은 1970년 이후로 가장 명랑한 축구를 펼쳤다. 소련을 2-1로 이겼고, 스코틀랜드를 4-1, 뉴질랜드를 4-0으로 이겼다. 2라운드 결선경기에서는 디펜딩 챔피언인 아르헨티나를 손쉽게 물리치면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비기기만 하더라도 준결승에 오를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를 손쉽게 이겼기에 모두가 이탈리아전은 그저 형식적인 수준의 경기가 펼쳐질 것이라 생각했다.

 

한편 이탈리아는 완벽한 카테나치오에서 벗어나 '이탈리아식 축구' 국면에 접어들었던 시기다. 그러나 여전히 조심스런 접근은 이탈리아 축구의 기본적인 전제였다. '에스타디 데 사리아' 경기장에서 벌어진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맞대결은 어떤 면에서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 공격 축구 vs 수비 축구


에레라의 카테나치오는 미드필드 지역의 수적 열세를 초래했고 그 결과 이탈리아는 네덜란드, 독일식 축구를 받아들여 리베로를 보다 더 올라운더 형태의 선수로 만들었다. 스스로 공을 가지고 나오거나 이탈리아가 공을 소유한 시점에는 미드필더처럼 뛰는 형태로 이바노 블라손이나 아르만도 피키같은 변형된 풀백의 형태로 보는 것보다 가에타노 시에라 같은 변형 인사이드 포워드에 가까웠다.


브라질과 달리 이탈리아는 저조한 성적으로 대회를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첫번째 3경기를 모두 비겼다. 카메룬도 이탈리아처럼 3무를 기록했지만 이탈리아는 득점수에서 앞서 1라운드를 통과했다. 승부조작 징계에서 벗어나서 갓 돌아온 파올로 로시는 최고의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를 2-1로 꺾으면서 이탈리아 선수들은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브라질의 골키퍼 발디르 페레스는 로시의 컨디션이 갑자기 살아날까봐 두렵다는 인터뷰를 했다. 아마도 페레스는 골키퍼보다 예언가의 능력이 더 뛰어났던 것 같다.

 

이 경기는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경기였을까? 1954년 월드컵 우루과이와 헝가리의 경기가 최고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경기는 충분히 월드컵 최고의 경기라 할 수 있을 경기였다.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경기에는 공식집계 44,000명보다 더 많은 관중들이 들어왔다. 만약에 브라질이 선제골을 넣었더라면 이탈리아는 쉽게 의기소침해졌을 것이시스템과 정신력으로 브라질을 따라잡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탈리아는 5분만에 선제골을 기록했다. 브루노 콘티가 40야드를 뚫고 전진하여 안쪽으로 파고들어온 공격적인 레프트백 안토니오 카브리니에게 공을 넘겨줬고 카브리니는 로시에게 크로스를 올렸다. 로시는 자신을 신뢰해준 베아르초트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는 헤딩골을 기록했다.

 

이제부터는 브라질의 공격 vs 이탈리아의 저항 형태의 경기가 펼쳐졌다. 그렇지만 7분만에 브라질이 동점골을 기록했다. 소크라테스가 지쿠와 원투패스를 활용하여 전진했고 골키퍼 디노 조프의 니어포스트쪽으로 골을 성공시켰다. 사람들은 브라질의 승리를 예감했지만 25분 후에 세레조가 큰 실수를 저질렀다. 세레조는 무심코 주니오르 쪽으로 애매하게 횡 패스를 시도했다. 이 때 로시가 공을 가로채서 발디르 페레스를 뚫고 골을 성공시켰다. 브라질은 당황했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파올로 로시는 후반전에 3-1로 만들 기회를 살리지 못했고, 2분 뒤 브라질이 팔상의 강한 슈팅으로 동점을 만들어냈다. 또 다시 브라질이 기세를 잡아가는 듯 했다.

 

앞서 말했듯이, 브라질은 비기기만 하더라도 준결승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골문을 걸어잠그는 것은 브라질의 방식이 아니었다. 브라질은 계속해서 공격을 시도했고 결국에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콘티의 코너킥이 어정쩡하게 처리되었고 마르코 타르델리의 빗맞은 슈팅이 로시에게로 갔다. 그리고 로시는 그것을 골로 연결시켰다. 브라이언 글렌빌은 "브라질의 화려한 미드필드진이 시험에 들었던 순간에 그들은 전방과 후방에서의 불완전함을 극복해낼 수가 없었다." 라고 말했다.

 

이 경기는 축구 역사의 한 단층을 차지하는 경기로서 이 날은 지쿠의 말처럼 축구가 죽은 날이 아닌 천진난만한 축구가 죽은 날이었다 : 즉, 이 경기 이후로 최고의 선수를 뽑아놓고 독려하는 것만으로는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기가 도래했고 시스템이 승리하는 날이 왔다. 물론 여전히 공격적인 재능을 뽐낼 여지는 남아 있었지만, 그들의 재능을 품어줄 수 있는 시스템 속에서 선수를 보호해주고 받쳐줘야만 하는 형식으로 축구는 변해갔다. 사실 이전부터 그랬는데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브라질 선수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이 먹힐 수 있었던 것은 멕시코의 더위와 높은 고도 때문이었다. 상대팀은 더위와 높은 고도로 인해 지속적으로 브라질 선수들을 강하게 압박할 수 없었다.

 

아이러니한 부분은 1982년에 이미' 이탈리아식 축구'는 시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제타의 저널리스트인 루도비코 마라데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탈리아식 축구가 한동안 효과를 보기 시작하자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이탈리아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플레이를 시도하게 되었다. 이는 이탈리아식 축구가 실패하는 이유가 되었는데 모두가 똑같은 시스템을 사용했고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등번호를 정하기 시작했다. 9번은 센터 포워드, 11번은 왼쪽에서 뛰는 세컨 스트라이커, 10번은 중앙에서 뛰는 공격형 미드필더, 7번은 토르난테(측면을 따라 내려와 수비를 돕는 윙어), 4번은 딥-라잉 미드필더, 8번은 링커맨으로 보통 중앙 왼쪽에 위치한 3번이 전진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었다. 대인마크 역시 쉽게 예측이 가능했다. 2번이 11번을 막으며, 3번이 7번을 막고, 4번이 10번을, 5번이 9번을, 6번은 스위퍼이며, 7번이 3번을 8번은 8번, 10번은 4번, 9번은 5번, 11번은 2번을 대안방어할 것이라 예측이 가능했다."

 

1982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물리친지 1년 만에 독일의 함부르크는 1983년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유벤투스를 꺾으면서 '이탈리아식 축구'가 쉽게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5년이 지나서 아리고 사키가 이끄는 AC 밀란은 경기에 임하는 이탈리아의 방식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그렇지만 그 때도 분명했고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은 사실은 시스템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출처 : http://www.guardian.co.uk/football/blog/2012/jul/25/italy-brazil-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