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Jonathan Wilson


프랑크 데 부어와 프랑크 레이카르트처럼, 축구관을 배운 아약스와 바르셀로나가 아닌 곳에서 쿠만 역시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로날드 쿠만이 에버튼에서 경질되기 한참 전부터 에버튼을 단지 바르셀로나로 가기 위한 디딤돌로 여긴다는 비판이 있었다. 과거 에버튼 소속이었던 케빈 랫클리프(Kevin Ratcliffle)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우리를 '우리(us)'라 부르지 않고 계속 에버튼이라 불러왔다." 쿠만은 2000년 비테세 감독으로 감독 커리어를 시작할 때부터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를 아주 분명히 밝혀왔다 : 바로 바르셀로나를 지휘하는 것.


전례없는 수준의 지원을 받은 에버튼을 강등싸움으로 몰아넣고 에버튼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목표를 비웃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제는 바르셀로나의 감독이 되기엔 너무나 많은 실패를 기록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때 쿠만은 바르셀로나의 감독 후보군이었고 어쩌면 다시 한 번 바르셀로나의 감독 후보군에 이름을 올릴 것이다. 그는 (바르셀로나를 지도하기에) 적합한 전통을 갖추고 있고 어쩌면 그것이 쿠만의 문제 일부 중 하나였을 것이다. 


로날드 쿠만은 흐로닝언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나 20세에 아약스에 입단했다. 쿠만의 아약스 입단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흐로닝언시절부터 쿠만은 아약스 선수처럼 보였다. 아약스 선수처럼 말했고 경기를 펼쳤다. 그는 수비수였으나 공을 뺏는 것보다는 패스에 강점이 있는 선수였다. 쿠만에게 아약스는 아주 완벽한 예비 학교였다. 축구경기에 대한 쿠만의 가치관은 아약스에서 확고해졌고 강화되었다. PSV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이후, 바르셀로나에서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하게 되었다. 쿠만은 항상 실용적인 경향을 보였지만, 자신의 축구철학적 성향에 대해서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2004년 쿠만이 이끄는 아약스에서 데뷔한 라이언 바벨(Ryan Babel)은 "쿠만은 굉장히 아약스 모델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 공을 높게 띄우지 않는 플레이 스타일, 4-3-3, 윙어, 많은 움직임과 포지션 변화." 


아약스가 아닌 바르셀로나에서 더 성공적이었지만, 아약스 모델이 지난 10년간 세계 축구를 지배했다. 쿠만이 왜 바르셀로나 감독을 목표로 하는지는 뻔해 보인다. 쿠만은 바르셀로나에서 클럽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루이 반 할의 보조자였고 이 때 바르셀로나에는 펩 과르디올라와 루이스 엔리케가 선수로 활약하고 있었으며 조세 무리뉴 역시 코칭 스태프 중 하나였다. 물론 무리뉴는 바르셀로나 축구에서 급격하게 멀어졌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축구관을 가진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위르겐 클롭, 디에고 시메오네보다는 무리뉴가 훨씬 포스트-크루이프인이라 볼 수 있다.


포스트-크루이프인들의 문제는 아약스 방식으로 운영되지 않는 팀에 부임했을 때 발생한다. 반 할은 바이언을 자신의 의지대로 끌고갈 강한 개성을 가진 인물이었고 과르디올라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반 할 역시 1970년대 시행되던 토탈 풋볼의 변형된 형태를 시행한 구단에서 일했다. 다른 사람들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프랑크 데 부어(Frank de Boer)는 가장 눈에 띄는 실패 사례다. 아약스에서 4차례 리그 우승을 했지만, 인터나치오날레와 크리스탈 팰리스에서는 팀을 19경기 밖에 지휘하지 못했다.


프랑크 레이카르트(Frank Rijkaard)의 성적은 특이하다. 레이카르트의 네덜란드는 자국에서 개최한 유로2000 준결승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배한다. 그 이후 레이카르트는 스파르타 로테르담의 감독으로 임명되지만 구단 역사상 첫 강등을 이끈 지도자가 되었다. 그에게 익숙한 축구 스타일로 돌아가는 바르셀로나에서 레이카르트는 2차례 프리메라 리가 우승과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끈다. 이후 갈라타사라이, 사우디 아라비아에서의 성적은 잘 풀리지 않았다. 루이스 엔리케도 마찬가지다. 로마에서의 실망스러운 1년, 셀타 비고에서의 평범한 1년은 바르셀로나를 이끌기 위한 이력서로 충분하지 못했다. 허나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2번의 프리메라 리가 우승과 챔피언스 리그 1회 우승을 이끌었다.


크루이프의 후예들은 크루이프의 정신이 남아있는 구단에서 최고의 성과를 낸다. 한 구단에서 실패했다고 그 감독의 축구관이 다른 곳에서 성공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 마찬가지로 한 구단에서 성공했다고 그 기술들이 다른 구단으로 당연히 옮겨지란 법도 없다. 뛰어난 레이싱 선수라 할지라도 스쿨 버스 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잉글랜드 축구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통용되는 말이다. 2개 구단에서 모두 우승을 경험한 감독은 단 4사람 뿐이다.


쿠만이 에버튼에서 실패한건 그가 바르셀로나를 잘 지도하는 것과 크게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패는 그를 반대하는 세력이 커지게 만들며 당연하게도 그건 결국 쿠만에게 좋지 않게 작용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쿠만의 정점 또한 2004년 아약스를 지도할 때로 느껴지는 것 역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아약스 동료인 라파엘 반 더 바르트에게 친선전에서 태클을 시도하는 순간부터 쿠만의 커리어는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드레싱룸에는 균열이 일어났고 이미 사이가 틀어진 쿠만과 기술 단장 반 할의 사이는 더욱 싸늘해졌다. 난장판 가운데 이브라히모비치가 유벤투스로 이적하게 되었고 스트라이커 없는 아약스는 붕괴되었다.


다가오는 2월 쿠만은 사임했다. 2년 후 PSV에서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 때 이후로 줄곧 쿠만은 또 다른 아약스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출처 : https://www.theguardian.com/football/blog/2017/oct/24/ronald-koeman-everton-post-cruyffians-ajax-barcelona



by Omar Saleem 


누군가에게 있어서 루이 반 할이란 인물은 지난 20년간 엄격한 형식을 위해 화려함을 희생하는 출중한 감독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심각할 정도의 원칙주의자로 여겨지며 팬들과 선수들로부터 거리를 만드는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당신이 루이 반 할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던간에 현대 축구에서 루이 반 할이라는 인물이 불화를 일으키는 감독 중에 한 명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감독은 7번의 리그 우승 타이틀, 4번의 유러피언 트로피를 획득한 감독이고 경험이 부족한 네덜란드 선수들을 데리고 월드컵 3위로 대회를 마감한 인물이다. 국내 컵대회 우승과 반 할 감독을 향한 긍정적인 코멘트들을 종합해보면, 그를 깎아내리는 평판들은 하찮아보일 수도 있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불화가 시작되는 것일까?


1991년 10월 20일로 돌아가보자. PSV는 필립스 스타디움에서 라이벌 아약스와 경기를 앞두고 있다. 에레디비지에 5라운드에서 두 팀이 대결을 펼치게 되었고 새로운 감독 루이 반 할 아래서 인상적인 시즌 스타트를 기록한 아약스는 홈팀 PSV의 축제를 망치고자 한다.


자유롭게 유기적이며 모험적인 아약스 축구는 반 할 아래서 조직적이고 밸런스 있는 접근에 기반한 축구로 변했다.  아약스의 플랜은 아주 명확했다 : PSV가 활용할 공간을 죽여 호마리우가 경기에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하는 것. 이 경기는 루이 반 할이 데니스 베르캄프에게 후방으로 내려와서 상대의 패스 길목을 차단하라고 지시한 첫번째 경기다. 더불어 베르캄프가 공개적으로 반 할 감독의 수비 가담 요구에 어깨를 으쓱이며 달갑지 않음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경기이기도 했다.


그 날부터 루이 반 할의 매니지먼트 성향이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리누스 미헐스, 요한 크루이프가 아약스에 심어놓은 화려한 축구 역시도 냉철한 강철 튤립(Iron Tulip, 반 할의 별명) 루이 반 할에 의해  변하게 되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과장이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de Godenzonen(아약스의 애칭, 신의 아들이란 의미)에서 반 할이 남긴 분열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반 할에 대한 베르캄프의 의견은 아주 명확하다. 1993년 암스테르담을 떠나 인테르로 향한 베르캄프의 결단은 반 할의 코칭 스타일에 반기를 드는 첫번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반 할에 대해 베르캄프의 자서전 <Stillness and Speed>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물론 반 할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 할 스스로가 보급시켰다고 생각하는 축구는 크루이프와 벵거의 축구이기도 하다. 반 할의 방식이 다른 것일 뿐이지 그게 전부다. 크루이프의 코칭 스타일은 자신이 선수였을 때 어떻게 했는가에 기반한다. 모험적이고 볼거리 풍부하고 공격적인 모습 말이다. 그에게 분석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는 본능에 충실하고 기술을 중요시한다."


"루이는 남을 가르치고 싶어한다. 그는 시스템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그에게 시스템은 아주 성스러운 것이다. 반 할에게 모든 선수들은 평등하다. 빅네임이란 것은 그에게 결코 존재할 수가 없다. 모든 구성원은 팀과 시스템,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의 시스템의 부속물이다. 크루이프는 위대한 선수들에게 개인주의자가 되도록 독촉했다. 왜냐면 그들 스스로가 경기를 결정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 할은 결코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왜냐면 그건 그가 추구하는 방식에 어긋나는 것이거든."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자. 10명의 평범한 화가가 있고 1명의 렘브란트가 있다고 하자.  당신은 렘브란트에게 "어짜피 너도 다른 10명과 다를 것이 없어"라고 말하며 다른 평범한 10명의 화가들과 동등하게 대할 것인가? 스스로 독창적인 상상을 펼치지 못하게 막을 것인가? 아니면 그에게 특별하다는 인상을 심어주어 우수한 작품이 나올 수 있도록 유도할 것인가?"


베르캄프의 이야기는 팀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반 할의 방식을 보여준다. 크루이프는 트레이닝에 대해 굉장히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인물이고 경기에서 아주 사소한 부분에 신경을 쏟는 인물이었다 : 개인의 퀄리티, 테크닉, 점유율과 압박. 반면에 반 할의 방식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구조와 형태의 패러다임이 우선이다.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명 선수들이 반 할 밑에서는 뛰기 까다롭다고 느끼고 있지 않을까 한다.


아약스에서 237경기 122골이라는 우수한 득점 기록을 남겼음에도 베르캄프는 반 할의 권위적인 지도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베르캄프와 반 할 사이의 이런 미묘한 감정은 바르셀로나에서 드러난 반 할과 히바우두 사이의 갈등과 결코 비교되기 어려운 수준이다.


68.7%의 승률을 기록한 아약스를 떠나게 되었고 그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구애를 받는 감독이 되었다. 아약스에서 6년간 11개의 우승을 차지했고 아약스의 주요한 역사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트로피는 물론이고 다수의 선수들이 아약스가 자체적으로 배출해낸 선수라는 것 역시 의미가 컸다. 일부 사람들은 6년 사이에 단 1차례만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기록했다는 것이 완벽한 실패라고 주장하지만 그건 당시 세리에A의 강세, 잉글랜드에서 부상하고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당시에도 여전히 막강했던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의 존재를 아주 완벽히 간과한 잘못된 의견이라 할 수 있다.


1992년 유러피언 컵 우승을 비롯해 1991년부터 1994년까지 4연속으로 라 리가 타이틀을 안겨줬고 현재의 바르셀로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력했던 팀을 이끌었던 감독 요한 크루이프는 미래를 위한 틀을 만들고 있었다. 칸테라에 미치는 크루이프의 영향력은 아주 상당했고 이 시스템을 거쳐서 성장하는 선수들의 테크니컬 퀄리티를 향상시키기 위한 트레이닝 프로그램 마련에 크루이프는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당시보다 더 많은 선수들을 자급자족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또한 네덜란드식 코칭 방법을 적용해 클럽은 스페인 전역, 특히 바스크 지역으로 스카우터를 점차 파견하기 시작했고 그 인원 수를 더욱 늘리게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 역시 마찬가지로 스카우터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크루이프의 장기적인 관점에 바탕을 둔 결정이었던 것이다.


크루이프는 끝내 1996년 바르셀로나를 떠나는데 그는 다양한 방면에서 클럽 운영의 컨셉을 잡아주고 팀을 떠나게 되었다. 클럽 아카데미의 코치 수급 방식, 인프라까지 개선해 놓았고 여기에서 크루이프가 아끼던 제자이자 홈그로운(home-grown), 바르셀로나 스타일로 철저하게 훈련이 된 펩 과르디올라가 배출되었다.


반면 크루이프와 달리 반 할이 아약스를 떠났을 때, 사람들은 테크닉을 중요시하는 트레이닝과 토탈 풋볼(totaalvoetbal)이 반 할 아래서 엄격한 규율에 따라야하는 구조에 기반하는 트레이닝으로 바뀐 것을 비웃었다. 크루이프는 자신의 방식을 바꿔놓은 반 할의 코칭 스타일에 대해 곱지않은 시선을 보냈다.


"우리는 축구를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 나쁜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방식으로 선수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축구장 피치 위에서 시도해야하는 것이 아닌 사무실에서나 시행되어야할 방법이다." 


반 할은 바르셀로나에서 메이저 스타들을 다루는 방식으로 인해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히바우두가 아주 적절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히바우두는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공격력에 제한선이 생길 것이라 생각해 윙으로 경기에 나서는 것을 거부했다가 벤치에 앉아야만 했다. 그는 특히 반 할이 빠른 속도를 이용해 역습 전개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풀백을 커버하기 위해서 후방까지 내려오는게 과연 가치가 있는 움직임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바르셀로나에서 리오넬 메시는 항상 상대 진영에 머물러있다. 히바우두같은 재능에게는 어느 정도 타협을 해도 되지 않았을까? 


카탈루냐 관중들에게 히바우두가 벤치로 물러나야한다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세계 최고의 선수가 관중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벤치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고 이는 크루이프와 반 할의 가장 극명한 차이기도 했다. 


크루이프가 누 캄프에서 감독 생활을 했을 때, 그에게는 다루기 어려운 선수 3명이 있었다. 스토이치코프, 라우드럽, 호마리우. 추가로 크루이프의 마지막 시즌에 로베르토 프로시네츠키가 합류했다. 사소한 불화들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는 메이저 스타들이 경기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만들어 승리를 쟁취해냈다. 팬들이 즐거워하는 축구에는 결코 고집불통이란 것은 있지 않았다.


이것이 아마 2번의 라 리가 타이틀을 획득했음에도 루이 반 할의 바르셀로나가 잡음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55%의 승률과 최고 수준의 스쿼드에도 불구하고 2000년까지 챔피언스 리그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한 것이 바르셀로나 시절의 기억을 희석시킨다. 충분하지 않은 성적이었고 그 때부터는 팀이 쇠퇴하려는 조짐이 보이기까지 했다.


히바우두 이후로, 야리 리트마넨의 경기 소화시간 부족 역시 도마위에 올랐다. 리트마넨은 아약스시절 가장 영향력있는 퍼포먼스를 보여준 스트라이커였지만 바르셀로나에서는 골칫거리였다. 리트마넨에 대한 반 할 감독의 코멘트는 왜 그의 지도 방식이 양극단의 평가를 받게 되는지 아주 극명하게 보여준다.


"선수는 중요하지 않다. 팀이야 말로 모든 것이다. 나는 선수들의 피치 위에서의 퀄리티 이상의 가치를 요구한다. 특히 피치 위에서 모든 것을 다 던져놓을 수 있는가에 대한 자세같은 것 말이다.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방식에 따르지 않으려는 개성과 성향을 가진 선수들이 있다."


이번에도 반 할은 창조적인 자원들을 가지고 자유로움을 부여하지 않았다. 비슷한 구성원이었지만 크루이프는 득점을 바라본 반면, 반 할은 상대의 침투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 것에 집중했다.


그는 네덜란드를 2002년 월드컵에 데려가지 못했다.  "네덜란드는 아일랜드보다 더 우수한 탤런트를 보유하고 있다."라는 오만한 그의 발언은 네덜란드의 월드컵 진출 실패로 인하여 그의 지도 방식에 궁극적인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이제는 그의 방식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이 더욱 많아졌다.


놀랍게도 2002년 후반, 그는 다시 바르셀로나 지휘봉을 잡게된다. 약 6개월간 30게임 정도를 소화한 이후 다시 바르셀로나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다. 반 할은 바르셀로나와 맞지 않았던 것이다.



2년 반의 공백기를 청산하고 반 할 감독은 AZ 알크마르 감독직으로 복귀를 신고한다. 1988년 알크마르의 수석 코치로 일을 시작했기에 그에게는 결코 낯선 클럽이 아니었다. 나를 포함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AZ 알크마르가 반 할 감독의 최대 업적이라 생각한다. 2006년 2위로 시즌을 마감하더니 2007년에는 3위를 기록하는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마침내 그는 2009년 리그 타이틀을 차지한다.


AZ 알크마르는 반 할의 커리어에 있어서 아주 신선한 곳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자신을 지키기 급급한 클럽 팀의 감독을 맡아보게 되었고 상황이 긍정적이지 못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방법론을 밀고 갈 수 있는 클럽을 지휘한 것이다. 즉 AZ 알크마르는 과거 그가 지휘하던 아약스, 바르셀로나, 네덜란드와는 그 규모가 달랐던 곳이었다.


구단의 신뢰에 반 할 감독은 무사 뎀벨레, 저메인 렌스, 아리, 그라차노 펠레, 세르히오 로메로, 니클라스 모이산더 등의 선수들을 데리고 에레디비지에 타이틀을 획득으로 보답한다. 중위권으로 시즌을 마감할 것이라는 전망과 달리 알크마르는 FC트벤테와 아약스를 제치고 8개월의 무패 기간을 기록하며 타이틀을 따낸다. 


리그 최고의 수비 기록과 더불어 무니르 엘 함다위, 아리의 득점력 역시 알크마르 우승에 보탬이 되었다. 알크마르는 역습을 바탕으로 이기기 쉽지 않은 팀이 되었다. 빅클럽에서는 승리와 경기 스타일 모두가 중요하지만 알크마르에서는 스타일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실재하는 승리야 말로 알크마르 입장에서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알크마르에서는 유스 선수 수급에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뎀벨레, 모이산더, 로메로, 렌스, 펠레와 함께 성공을 거둔 것은 결코 과소평가 되어선 안 될 것이다. 선수들에게 목표를 정해주고 훈련을 통해 목표를 이뤄낼 수 있는 완벽한 팀을 만들어냈다. 슈퍼스타가 아닌 효율적인 축구 선수를 만들어냈다. 확실한 것은 슈퍼스타를 길러내진 못했다는 것이다. 현재 이들의 위상이 어떤지 생각해보라. 그런데 반 할은 이들을 조화시켜 에레디비지에 우승을 차지했다.


그 다음해 알크마르가 타이틀 방어에 실패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론 반 할이 바이에른 뮌헨으로 떠났지만 다시 타이틀을 사수하는 것은 알크마르 입장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AZ 알크마르를 네덜란드 내에서 우수 클럽으로 발돋움시켰고 다시 한 번 자신의 명성을 입증했다. 알크마르 시절은 스페인과 네덜란드 대표팀을 맡으면서 쌓여온 부정적인 이미지 청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다음 단계는 바이에른 뮌헨이다.



반 할은 "나는 내가 꿈꾸던 클럽에 왔다" 라고 말하며 바이언에 입성했고 아르연 로번을 데려왔다. 지금까지 자신이 지도한 팀에서 우수한 재능을 컨트롤 하는데 있어서 다소간 마찰을 빛어온 감독이지만 그에게도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챔피언스 리그 트로피를 차지한 아약스의 세대 그리고 20살도 안 된 시점에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데뷔기회를 준 로번이 바로 그 예외라 할 수 있다.


반 할에게 있어서 바이에른 뮌헨 감독직은 자신의 커리어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초반에는 또 다른 위르겐 클린스만이 부임한 것처럼만 느껴졌고 결과는 형편없었다. 반 할은 항상 자신의 방법론을 팀에 주입시키는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감독이 있기는 할까? 어느 감독에게나 시간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충분한 시간 보장과 성적은 서로 틀어져있는 관계이다. 처음으로 그가 스타일을 바꿔야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반 할 아래서 홀거 바트슈트버, 토마스 뮬러같은 선수들이 1군 주전멤버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가장 성공적인 변화는 윙어인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를 중앙 미드필더로 변화시킨 것이었다. 반 할은 바이언 코어(Bayern Core), 바이언 유스 출신들이 팀의 척추 라인을 휘어잡는 일을 해냈다.


뮬러는 반 할의 이상적인 포워드이다. 측면과 중앙 미드필드 지역까지 가리지않고 열심히 움직이는 선수고 팀을 우선시하며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선수다. 반 할이 그를 중용한 것은 아주 시기적절한 결단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빅스타와 반 할은 마찰을 일으키고 만다. 이번 상대는 박스 안에서는 효율적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못한 루카 토니였다. 토니는 빌드업 과정에서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고 역습 전개에도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했다. 또한 상대의 뒷공간을 파괴하는데 적합한 유형도 아니었다. 반 할은 팀의 치밀한 구조를 원하면서 동시에 상대의 뒷공간을 파괴할 수 있는 모습을 원했다. 결국 토니는 전술의 희생양이 되었고 팬들은 크게 실망했다.


토니를 팀에서 제외시켰지만 그는 결국 2010년 분데스리가 타이틀을 차지한다. 독일에서 리그 우승을 차지한 첫번째 네덜란드 태생 감독이란 기록을 남긴 반 할의 시작은 아주 좋았다. 그렇지만 반 할에 대한 평가는 자국 리그가 아닌 유럽 대항전에서의 성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챔피언스 리그 조별라운드에서 보르도에 이어 2위를 차지한 바이언에 대해 팬들은 우승은 남들의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는 유력한 후보였다. 토너먼트 매치업에서 피오렌티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옹을 꺾으며 결승에 진출해 조세 무리뉴가 이끄는 인터나치오날레 밀라노를 상대한다.


반 할은 너무 신중하게 생각했고 묘책을 부리려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제자 무리뉴는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장점을 다 보여줬는데 정작 스승은 그러지 못했다. 무리뉴는 선수 개인의 탤런트와 자유를 보장하면서 팀이 최우선이라는 철칙을 효율적으로 섞어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테르는 정말 상대하기 어려운 팀이 되었다. 규율을 중요시하면서 슈퍼스타를 위한 게임을 만들어줄 수 있는 무리뉴는 보다 현대적인 사고를 지닌 반 할이라 할 수 있다.


2010/2011시즌은 리그 3위라는 성적으로 누가봐도 용납할 수 없는 성적을 만들어냈다. 위르겐 클롭이 이끄는 도르트문트에게 승점 10점이 뒤쳐진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하는데 누가봐도 차이가 극명했다. 한쪽에는 신선하고 유머러스하고 팬, 선수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위르겐 클롭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스타 플레이어와의 불화를 일으키고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는 루이 반 할이 있다. 반 할에게 보내는 독일 축구의 짧았던 애정선은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독일 저널리스트가 이렇게 물었다. 반 할 스스로 본인이 신(god)이라 생각하고 있는게 아닐까? 라는 물음에 울리 회네스는 아주 직설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단순히 신이 아니라 그는 자신이 신의 애비라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껄?"



이 때부터 요한 크루이프와 반 할의 마찰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사실 두 사람의 첫번째 갈등은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그는 공개적으로 반 할의 방법론에 대해 반감을 표출했다. 네덜란드에서는 결코 무시당할 수 없는 레전드 크루이프는 굉장히 직설적인 발언을 자주하는데 그의 발언은 이랬다. 


"반 할은 축구에 대한 훌륭한 시야를 가지고 있지만 축구에 대한 그의 사고방식은 나와 같지 않다. 그는 손발이 척척 들어맞고 마치 군대처럼 자신의 전술 철학을 시행할 수 있는 팀을 원한다. 나는 그런 팀을 원하지 않는다. 선수들 스스로가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크루이프는 반 할이 아약스에서 시도한 훈련 방식과 선수 선발에 관해 마찬가지로 비판을 한적이 있다.


"선수를 평가할 때는 직감과 가슴이 시키는대로 행동해야 한다. 현재 반 할의 지시에 따라 아약스에서 사용되고 있는 표준치에 따라 선수를 선발하면 실수하게 된다. 내가 15살이던 시절에 나는 왼발로 볼을 약 15m 정도 밖에 차지 못했다. 오른발은 아마 20m 정도? 당시에 나는 코너킥을 담당할 수 없었고 신체적으로도 약했으며 상대적으로 느린 편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훌륭한 테크닉과 통찰력이라는 2가지 퀄리티가 있었다. 그 2가지는 결코 컴퓨터로 측정할 수 없는 가치이다."


크루이프의 발언은 자신의 가치와 충돌하는 철학의 가치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실례되는 발언일 수도 있다. 크루이프가 다소 직선적으로 말하는 성향인 것도 고려해야한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크루이프의 발언이 옳을 수도 있다. 왜냐면 크루이프의 시대 이후로 네덜란드가 국제 무대에서 세계를 주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반 할과 크루이프의 철학 중에서 누구의 것을 더 선호하는가?



우리는 이제 반 할의 커리어 막바지에 도달했다. 반 할이 2번째로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을 맡으며 이뤄낸 발전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선 안 된다. 그는 유망한 더치 스타들이 월드컵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만들었고 심지어 그들로 월드컵 준결승까지 이끌고 갔다. 사람들은 네덜란드가 고전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월드컵 4강 진출은 상당한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반 할의 네덜란드는 아주 전형적인 반 할스러운 팀이었지 네덜란드스러운 느낌을 뿜어내는 팀이 아니었다 : 엄격한 대열 유지, 조직력, 역습을 바탕으로 하는 반 할스러운 팀이었다. 물론 네덜란드 내부에서는 이러한 경기 접근법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이 있지만, 이것은 그토록 헐거운 수비를 가지고 펼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었다. 지난 20년간의 커리어를 돌이켜보면 고유한 스타일이란 것은 반 할 아래서 언제나 희생되기 일쑤였던 것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루이 반 할의 매니지먼트 결과물을 받아들이고 있다. 4위로 시즌을 마감하면서 다시 챔피언스 리그 무대에 복귀를 신고하지만 빅네임과의 충돌은 다시 시작되고 말았다. 세계에서 반 할과 가장 친분을 쌓고 있다는 평이 자자했던 로빈 반 페르시는 순식간에 우선 순위에서 밀려났고 팔카오는 반 페르시보다는 조금 더 괜찮은 대우를 받았지만 몸상태가 정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경기에 꾸준히 나서지 못한 것은 팔카오에게 (몸상태를 끌어올리기 위한) 결코 반가운 해결책이 아니었다. 앙헬 디 마리아의 경우는 왜 그토록 폼이 다시 살아나지 못했는지 여전히 미스테리한 부분으로 남아있다.


다비드 데 헤아까지도 떠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제 반 할에겐 위한 테스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야누자이, 맥네어, 윌슨, 페레이라같은 올드 트래포드의 유망한 어린 자원들을 가지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최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아카데미에서 배출해낸 자원들이 시원찮으나 이들의 퀄리티는 충분히 좋다. 다만 성적이 더 중요한 상황에서 반 할은 어린 선수들에게 경험을 쌓을 기회를 부여할 수 있을까?


에슐리 영은 개인의 우수한 퍼포먼스 뿐만 아니라 반 할의 철학에 딱 들어맞는 모습을 보이면서 부활을 선언했다. 호전적이며 열심히 뛰는 영과 발렌시아는 반 할의 철학에 부합하는 선수들로 2014/2015시즌 재기에 성공했다. 시스템 속에서 철저하게 움직이는 마테오 다르미안, 모르강 슈네들렝,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영입되었고 다가오는 2015/2016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클래식한 반 할의 모델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창조적인 멤피스 데파이, 후안 마타, 웨인 루니에게 어느 정도의 공격적 자유도 희생이 따르는지가 관건이다. 반 할의 축구 모델이 잘 돌아가느냐 역시 중요하지만 공격 자원들이 만족할 수 있게 자유도 제한에 있어서 적정선을 유지하는 것 역시 중요할 것이다.  



우리는 직선도로 한 가운데에 위치해있다. 한쪽 방향은 요한 크루이프가 있고 그와 함께 베르캄프, 과르디올라가 위치해있고 숏패스를 선보이고 있다. 다른 방향은 반 할이 위치해있고 그 옆에는 론 블라르, 토마스 뮬러같은 선수들이 마치 기계마냥 반복적인 세트피스 훈련을 연습하고 있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어디를 선택할 것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축구의 아름다움은 어떤 것인가? 여기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지난 20년간 분열과 함께 성공 스토리를 기록한 루이 반 할에 대해 당신이 어떠한 평가를 내릴지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다. 




출처 : http://thesefootballtimes.co/2015/08/02/louis-van-gaal-divis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