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호베르투 카를로스'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6.05.25 풀백은 어떻게 피치 위 가장 중요한 포지션이 되었는가?



by Jonathan Wilson (본문은 2009년 3월 25일에 작성되었습니다)


잭 찰튼(Jack Charlton)은 처음으로 풀백이 11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포지션이라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팀의 공격을 이끌어가는 선수중 가장 핵심적인 선수가 풀백이라는 찰튼의 주장은 당시에 굉장히 이상한 소리로 받아들여졌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그런데 우리는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굉장히 공격적인 풀백을 보유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1994년 브라질에는 조르지뉴(Jorginho)와 브랑코(Branco)가 있었고 1998년 프랑스에는 릴리앙 튀랑과 비센테 리자라쥐가 있었다. 2002년에는 호베르투 카를로스와 카푸가 있었고 2006년에는 지안루카 잠브로타와 파비오 그로소가 있었다.


월드컵 우승 국가에 공격적인 풀백이 좌우로 있었다는건 어쩌면 단순한 우연의 일치겠지만, 전술 싸움에서 풀백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트렌드임이 분명하다. 유로 2008에서 스페인이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경기를 기억해보자. 지금 이 경기를 기억하는데 있어서 '3:0 스코어와 안드리 아르샤빈의 부진'이 가장 많이 언급된다. 그러나 이 경기의 시작은 생각보다 팽팽했다.


러시아의 에이스였던 아르샤빈은 스페인의 마르코스 세냐의 압박으로 힘든 경기를 펼쳤다. 그러나 경기의 판을 뒤흔들었던 결정적인 순간은 34분에 있었던 다비드 비야의 부상이었다. 비야의 부상으로 비야가 빠지고 세스크 파브레가스가 투입되었으며, 스페인은 4-1-3-2 포메이션에서 4-1-4-1 포메이션으로 전환했다. 러시아의 유리 지르코프와 알렉산더 아뉴코프는 유로 2008 대회에서 적극적인 공격 가담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던 선수들이었는데 이제 이 선수들이 다비드 실바와 안드레아스 이니에스타를 더욱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되어버렸다. 이니에스타와 실바를 직접 마주하게된 아뉴코프와 지르코프는 자연스럽게 공격 가담 횟수를 줄였고 이에 러시아의 유기적인 움직임은 사그라들었다. 스페인이 미드필드 구역을 장악하기 시작했으며 후반전에만 3골을 기록하게 되었다. 유로 2008 득점왕인 다비드 비야가 없는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스페인은 최고로 효율적인 경기를 펼쳤다. 


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인터나치오날레 밀라노의 챔피언스 리그 16강 1차전을 떠올려보자. 전반전에 마이콘의 공격 가담을 제지하기 위해서 퍼거슨 경은 박지성을 선택했고 박지성은 마이콘의 전진을 막아냈다. 인테르의 미드필더들이 폭을 좁게 유지하여 위치해있었기에 파트리스 에브라에게는 앞으로 전진할 공간이 많았다. 11vs11의 싸움이었지만 경기장에는 유나이티드 선수가 1명 더 많은 느낌이었다.


하프-타임에 조세 무리뉴 감독은 형편없는 경기를 펼친 넬슨 리바스를 빼고 이반 코르도바를 투입했다. 수비가 조금 더 안정을 찾게되자 에스테반 캄비아소가 전반전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경기를 펼치게 되었고 -전반전에 캄비아소는 사실상 센터백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하비에르 자네티가 에브라의 전진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전반전에 비해서 후반전에는 양팀이 더욱 대등한 경기를 펼치게 되었다.



브라질에서의 근원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풀백 개념은 50년대 브라질에서 발전했다. 4-2-4 포메이션의 시초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은 굉장히 복잡한 논쟁거리들 중 하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1958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국가도 4-2-4 포메이션을 사용하지 않았다. 흔히 우리에게 브라질의 이미지는 '공격적 색채'가 강하다. 그런데 그런 브라질이 3명의 수비수를 활용하는 W-M 포메이션이 아닌 4명의 수비수를 배치하는 4-2-4를 채택했다는 것은 지금으로썬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3명의 수비수를 둔다고 공격적이고 4명의 수비수를 둔다고 수비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포메이션 그 자체는 항상 중립적인 것이고 그 포메이션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공격적인 운영, 수비적인 운영- 에 팀의 색깔이 구분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4-5-1 포메이션은 그 자체만으로 결코 수비적이지 않다)


여기서 용어에 대한 정리를 확실하게 해두고 넘어가야할 것 같다. 잉글랜드에서 '풀백(full-back)'은 2-3-5 포메이션의 유물이다. 기존의 2명의 수비수들은 W-M 시스템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센터 하프(centre-half)가 후방으로 내려왔기에 측면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미드필더(left-half)가 밑으로 내려오게 되면서 기존의 수비수 2명은 보다 더 측면으로 빠지게 되었고 이렇게 잉글랜드는 백4 라인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잉글랜드의 백4 라인 넘버가 오른쪽부터 2-5-6-3인 이유이다)


반면 브라질에선(스페인어권 국가에서 대체로 비슷할 것이다) 풀백(full-back)은 '측면(lateral)' 그 자체를 의미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풀백의 정의에는 선수들이 배치되는 폭의 넓이만 설정되어있지 이 선수들이 위치하는 깊이(전방 혹은 후방)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 브라질에서 '풀백'이란 단어는 그 선수가 측면에 위치한 선수라는 것을 의미하지 반드시 수비적인 임무를 가진 선수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내포한다. 브라질 축구 특유의 공격 지향성이 여기서 드러난다. 1949년 아스날은 브라질 투어를 시도했고 전반적으로 성공적인 투어를 펼쳤으나 브라질에서 굉장히 당혹스러운 경기를 맞이했다. 당시 아스날의 풀백이었던 로리 스콧(Laurie Scott)은 이렇게 아스날의 1949년 브라질 투어 경기였던 플루미넨세전을 회상한다. "갑자기 어떤 선수가 측면에서 나타나서 공을 잡고 슈팅을 시도하더라.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둘러보면서 누가 맨마킹에 실패했는지 서로를 탓하려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누구도 자신의 마크맨을 놓치지 않았다는걸 알게 되었고 슈팅을 시도한 선수가 상대의 풀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공격적인 플레이를 전혀 거리낌없이 시도했다."


그러나 풀백의 과도한 전진은 브라질 축구에 크게 도움되지 않은게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브라질은 코파 아메리카 대회에서 고작 2회 우승에 그쳤었고 1950년 우루과이와의 월드컵 결승전에서는 2골 모두 레프트백인 비고데(Bigode)가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있었기 때문에 실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물론 4-2-4 포메이션이 브라질의 공격적 성향이 한껏 발휘될 수 있도록 촉진한 구조임에는 틀림 없다.


풀백 앞의 공간을 향해 풀백들이 전진하면 동시에 그들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임무가 수행되어야한다. 맨투맨(man-to-man)방어를 포기하면, 풀백은 수비에 부담감을 덜 느끼면서 전진할 수 있다. 한명이 전진하면 다른 3명의 선수들이 4명이 차지하고있는 공간을 커버해주면 되고 W-M 시스템에서 3명으로 수비했었기 때문에 이러한 유동성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1958년, 1962년 브라질이 월드컵을 차지하는데 있어서 좌우 풀백을 담당했던 닐톤 산토스(Nilton Santos)와 자우마 산토스(Djalma Santos)의 기여도는 종종 간과되고 있지만 이들은 브라질이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선수들이었다.



자연스런 진화


형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브라질의 가린샤(Garrincha)는 계속해서 전방에 위치했지만, 반대편에 위치한 마리우 자갈루(Mario Zagallo)는 피치 위아래를 왕복(수비 가담)하면서 정통 윙어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1966년 잉글랜드는 오늘날 4-1-3-2로 묘사되는 윙어없는 전술을 사용했다. 당시 잉글랜드의 풀백이었던 조지 코헨(George Cohen)과 레이 윌슨(Ray Wilson)은 브라질 선수들만큼 공격력이 화려하진 않았지만, 이들의 오버래핑은 잉글랜드가 공격을 풀어나가는데 아주 핵심적인 요소였다. 풀백의 오버래핑 시도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진화다 :  막아야할 상대팀 윙어가 없다면 풀백은 더욱 과감한 플레이를 펼칠 수 있고 동시에 만약 우리팀에 윙어가 없다면 풀백은 팀 공격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 공격을 시도해야한다. 


1970년 브라질은 단 한명의 공격적인 풀백을 활용했다. 오른쪽 풀백인 카를로스 알베르토(Carlos Alberto)가 전진하고 왼쪽에는 에베랄두(Everaldo)가 수비 진영에 남아 밸런스를 맞추었다. 공격 가담을 좌우를 언밸런스하게 지시하는 것은 처음에 특이한 전술로 받아들였지만, 이것은 하나의 트렌드였다. 리베로(libero)를 배치한 다수의 유럽 팀들은 한쪽 측면에는 공격적인 풀백을 배치하면서 다른쪽에는 대인방어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정도로 수비적인 선수를 배치했다 : 지아친토 파케티(Giacinto Facchetti)와 타르치시오 부르니크(Tarcisio Burgnich)는 엘레니오 에레라(Helenio Herrera)의 인테르의 좌우 풀백이었고 파울 브라이트너(Paul Breitner)와 베르티 포그츠(berti Vogts)는 1974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서독의 풀백이었다. 1982년 월드컵 우승국인 이탈리아의 풀백은 안토니오 카브리니(Antonio Cabrini)와 클라우디오 젠틸레(Claudio Gentile)였다.


이 3가지 조합을 보았을 때, 우리는 왼쪽에 위치한 선수가 공격적인 선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왼쪽에는 공격적인 풀백을 두고 오른쪽에는 수비적인 선수를 배치하는 것은 하나의 정석과 같은 행동이었다. 지안루카 비알리(Gianluca Vialli)의 주장은 이러하다 : 라이트백은 팀에서 가장 최악인 선수가 담당하는 포지션이다. 평균 이상의 신장을 갖춘 선수가 수비력이 좋다면 그 선수는 중앙 수비수로 기용될 것이다. 만약 볼을 잘 다룰 수 있는 선수면 그 선수는 미드필더로 활용될 것이며 자연스럽게 수비적이지도 않고 기술력도 두드러지지 못한 선수가 라이트백 자리를 담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레프트백은 특수한 케이스이다. 일단 왼발잡이 선수가 흔하지 않으며 왼발잡이들은 보통 재능있는 선수들이 많다. 물론 비알리의 주장은 20여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그 힘을 잃어버렸다.


윙어가 없는 시대에서 윙백이 출현하게 되었고 그런 변화는 풀백을 다시금 자유롭게 만드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1명의 스트라이커를 두는 전략적 움직임이 생겼고 3명의 중앙 수비수를 배치하는 것은 낭비적인 일이 되어 다시 백4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풀백에게 공격적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풀백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해졌고 이 때문에 다니 알베스가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하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제 측면에만 머물러있는 윙어를 배치하는 팀은 없다. 4-2-3-1 포메이션은 경기장에 다시 드리블러가 등장할 수 있게 만들었고 드리블러들은 중앙에서 수적 열세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측면에만 머물러있지 않는다. 4-4-2 포메이션에서의 윙어들도 피치 높은 곳에만 위치해있지않고 후방으로 내려온다. 따라서 잭 찰튼의 주장처럼 피치 위에서 자신의 앞 공간이 허락되어진 선수는 풀백밖에 없다. 공간이 있는 곳에 기회가 있다(where there is space there is oppertunity). : 직접적으로 상대해야하는 윙어가 없다면 풀백은 전진해서 전방에서 수적 우위를 만들 수 있다. 유나이티드가 인테르를 상대로 산 시로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상대 풀백에 대응한다


문제는 풀백들에게 상당한 공격 의존도를 지닌 팀이라면, 유로 2008에서의 러시아처럼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슐리 콜과 조세 보싱와에게 과도하게 전진을 요구했던 첼시의 루이스 필리페 스콜라리 감독은 상대팀들이 두 선수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미드필더 숫자를 늘리자 첼시에서 처참한 실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풀백의 공격력이 중요시되면서 박지성과 딕 카윗처럼 피치 전방에 위치하면서 수비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선수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런 부류인 선수의 등장은 지난 몇시즌간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가 아닐까 싶다. 엘레니오 에레라가 이끌던 인테르에는 오른쪽 윙어에 자이르(Jair)란 선수가 있었는데 이 선수는 '토르난티(tornante)'라고 불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토르난티는 영어로 표현하면 'returner'이며 토르난티의 역할은 클래식 카테나치오 전술에서 자신의 공격 가담을 억제하고 상대 풀백의 전진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박지성과 딕 카윗은 토르난티의 현대적 재림인 것이다.


공격적인 윙어와 공격적인 풀백이 대결을 펼치면 흥미로운 장면들이 많이 발생한다. 지난 2007-2008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바로 그 적절한 예시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에슐리 콜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상대로 좋은 경기력을 펼치기에 알렉스 퍼거슨 경은 호날두를 왼쪽 측면으로 보내서 마이클 에시엔과 대결을 펼치게 만들었다.


약 30분간 호날두는 철저하게 에시엔을 파괴했다. 개인기로 에시엔을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에시엔보다 더 높에 점프하면서 유나이티드에게 리드를 안겼다. 호날두가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니 호날두를 더 많은 선수를 활용해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첼시는 그 반대의 전략을 꺼내 오히려 에시엔이 공격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첼시는 미드필드 진영에서 한 명이 더 있는 효과를 누렸고 경기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첼시는 호날두를 내버려두었지만 호날두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프랭크 램파드의 동점골도 사실 에시엔의 전진이 있었기에 가능한 골이었다. 첼시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대결 흐름은 에시엔과 호날두의 대결로 표현할 수 있는 경기였다.


잉글랜드가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4:1 승리를 거둔 것 역시 윙어와 풀백의 대결로 결정지어졌다. 유로 2008에서 다니엘 프라니치의 적극적인 오버래핑은 오른발잡이인 이반 라키티치가 왼쪽에 위치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중앙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시오 월콧을 만난 프라니치는 수비도 엉망이었고 공격 가담도 수월하게 진행하지 못했다. 프라니치의 공격 가담 감소로 크로아티아의 공격적 위력이 죽어버렸고 프라니치는 월콧을 상대로 자신의 수비적 결함만 노출했다. 이 날 월콧은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2010년 월드컵에서 -리오넬 메시, 프랭크 리베리, 웨인 루니, 페르난도 토레스, 사무엘 에토, 호비뉴-같은 포워드나 판타지스타들이 신문 1면을 장식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경기의 승패를 결정짓는 대결은 -세르히오 라모스, 필립 람, 알렉산더 아뉴코프, 파트리스 에브라, 다니 알베스, 에슐리 콜-이 위치한  풀백 자리에서 펼쳐질 것이다.




출처 : http://www.theguardian.com/football/blog/2009/mar/25/the-question-full-backs-footb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