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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5.24 루이 반 할의 지루한 축구는 감독 자리를 위태하게 만들 수 있다




by Jonathan Wilson


루이 반 할의 피치 밖 독특함은 팬들에게 즐거운 소재가 되고 있지만, 경기장 내에서 하품을 만들어내면 그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나가는 문을 열게만들 것이다. 데이브 섹스턴이 그랬다. 



그들은 현재 오직 승리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경기를 이기면 모든 죄악이 (형편없는 경기력) 잊혀질 것이라는게 그들의 주장이다. 뭐,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올드 트래포드는 점차 점유율을 바탕으로 하는 반 할의 프로세스의 실망스러움을 표출하기 시작했고 무득점 무승부가 쌓여지면서 팬들은 "공격! 공격! 공격!"을 외치고 있다. 그리고 그 외침이 들리는 시간대가 점점 앞으로 당겨지고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란 클럽이 재미없는 축구를 펼친다는 이유로 감독을 짜른 적이 없었느냐? 그건 아니다.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이끌었던 데이브 섹스턴은 4년의 시간동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단 하나의 트로피도 안겨주지 못했으나 그는 팀을 FA컵 결승전으로 이끌었고 팀은 리그에서 2위를 차지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는 7연승을 거두고도 섹스턴은 감독직에서 물러나야만하는 다소 억울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를 해고하기로한 결단은 1980/1981시즌이 끝나기 3개월 전에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고 전해진다.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5경기 동안 무득점이었고 이후 레이 윌킨스의 뛰어난 활약이 섹스턴의 상황을 어느 정도까지는 호전되게 만들었지만 이미 그 때는 섹스턴을 짜르기로한 결정이 내려지고 나서였다. 


겉보기에도 섹스턴과 반 할은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다. 섹스턴은 항상 대중에게 서투른 감독이었고 질문에 답하기 전에 마른 침을 한 번 삼키는 자신의 버릇을 흉내내는 저널리스트들보다 선수들과 대화하는 것을 과하게 선호했다. 반면에 반 할의 컨퍼런스는 항상 강렬하다. 그가 언제든지 특이한 언행을 취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인식이 이미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다. 또한 섹스턴은 자신의 전임 감독들과 동료 감독들과의 비교에 상당히 골머리를 앓았던 인물이었다.


1977년 여름, 토미 도허티를 대체하는 인물이 누가되었건 그 사람은 상당히 힘든 도전에 직면했어야만 했다. 대담하고 자신만만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이끌었던 도허티는 자신의 성격에 맞는 포메이션, 그는 담대하게도 4-2-4 포메이션을 사용했고 고든 힐과 스티브 코펠을 앞세워 FA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도허티는 클럽의 물리 치료사의 아내인 매리 브라운과 불륜을 저지르며 경질되고 말았다. 도허티와 섹스턴은 너무나도 달랐던 인물이었다. 도허티와 달리 섹스턴은 예민하고 지성적이며 차분했던 인물이었다. 


섹스턴은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머뭇거리는 인물이었지만, 저널리스트들은 도허티를 자신의 사무실에서 저널리스트에게 와인까지 대접하는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저널리스트를 환대할수록 그들은 말콤 앨리슨과 존 본드가 이끌었던 맨체스터 시티 측에서도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마누엘 펠레그리니가 시티에 남아있는한 반 할은 항상 금요일에도 맨체스터를 대표하는 치열한 결투를 벌여야하고 적어도 그의 독특한 행동은 데이빗 모예스보다 더 많은 기삿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섹스턴은 앨리슨과 본드에 비해서도 조심하는 성격이었고 매사 신중했던 인물이었다. 그 결과 그의 팀은 구조적인 측면을 너무나 강조하는 스타일이 되어버렸다. 1977/1978시즌 앞서 언급했던 고든 힐은 36경기에서 17골을 기록했지만, 수비 가담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더비 카운티로 팀을 옮겨야만 했다.


그러나 여기서 감독의 성향만으로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1977/1978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67골을 기록하면서 리그 내 득점 순위 5위였는데 마찬가지로 실점 역시 63골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보다 더 많은 실점을 기록한 팀은 고작 6팀에 불과했다. 그 다음시즌에는 60골을 기록했고 63골을 실점했다. 1979/1980시즌 리버풀과 승점 동률로 시즌 마지막 경기를 시작했지만 리즈에게 1:4로 패배했다. 유나이티드는 시즌을 65득 36실 성적으로 리그 2위로 마감했다. 하지만 섹스턴의 마지막 시즌인 1980/1981시즌에 득점은 51득점 (36실점) 으로 더욱 나빠졌고 그는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섹스턴의 가장 성공적인 영입이라 거론되는 고든 맥퀸은 자신이 수비 코치인 줄 알았다고 우스갯소리를 남기기까지 했다.


대중에게 비춰지는 섹스턴의 이미지는 "지루함, 과도한 분석, 그에 따른 너무나 복잡한 전술 설정" 으로 남아있다. 또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선수 생활을 보내지 않았다는 부분 역시 외부인으로서 그의 이미지를 굳히는데 한몫 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스코틀랜드 감독은 기꺼이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런던 태생의 인물에게는 아직까지 보수적이었던 것이다. £825k을 지불하며 데려온 레이 윌킨스 역시 이적 초기에는 따가운 시선을 받았었다.


1980년 마틴 에드워즈가 회장의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당시 이적 시장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여러 부침을 겪었다. 섹스턴은 이적료 최고액을 지불하며 코벤트리의 골키퍼 짐 블라이스를 영입하려 했는데 선수가 메디컬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케빈 맥벗은 브리스톨 시티의 잔류하고자 유나이티드행을 거절했다.


지역 출신 스트라이커로 기대를 모았던 앤디 리치는 오늘날 대니 웰백처럼 브라이턴으로 떠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거기서 얻은 영입자금 £1.25m으로 개리 버틀스를 영입했지만 그는 이적 첫시즌에 단 한골도 기록하지 못했고 머지않아 다시 노팅엄 포레스트로 돌아갔다.


힐을 대체하기 위해서 영입된 미키 토마스는 너무나도 긴장한 나머지 트레이닝장으로 출근하는 첫날부터 운전사고를 내버렸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겁먹은 모습만 보여주고 말았다.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에서 영입한 세련된 중앙 수비수 니콜라 요바노비치는 잉글랜드의 술문화와 잉글랜드식 축구에 당황한 나머지 1년만에 팀을 떠났다.


섹스턴은 공을 측면으로 보내고 박스로 침투하라는 도허티의 철학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 유나이티드 팬들은 도허티가 보여준 방식의 축구가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섹스턴이 자신의 전술적 철학을 설명할수록 사람들은 섹스턴이 너무나 보수적이라는 생각만 했고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동시에 섹스턴은 이적시장에서의 삽질로 더욱 악화된 여론과 싸워야만 했다. 섹스턴을 짤라야한다는 울림은 아주 분명했다.


현재 반 할의 행동이 뻔하다거나 (예측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거나) 외부적으로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고 발생한 문제는 없다. 다만 올드 트래포드의 과거를 돌아보면, 경기 스타일은 충분히 감독을 경질시킬 수 있다.




출처 : http://www.theguardian.com/football/blog/2015/dec/03/louis-van-gaal-manchester-united-boring-s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