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yan Giggs (원문은 2016년 12월 9일에 작성되었습니다)


나는 1991/1992시즌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군에서 정기적으로 경기에 출전했다. 급격한 성장세를 보인 모든 10대 선수들이 겪는 문제를 나도 겪었다. 선수로 발전할 시기에 나는 몇가지 사항들을 놓치고 만 것이다. 1991/1992 시즌이 시작될 무렵 나는 17살이었고 이미 지난 3월 1군 무대 데뷔를 마친 상황이었다. 풋볼 리그 마지막 시즌(1991/1992) 나는 무려 38경기에 출전했다.


그 다음 시즌 그러니까 프리미어 리그 출범 첫 시즌에 나는 41경기를 뛰었다. 사람들은 그 때부터 내가 유소년 시절을 되돌아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어린 나이에 급격하게 성장한 선수들이 겪는 한가지 문제는 어린 시절에나 배우는 몇가지 기본적인 사항에 대한 배움을 건너 뛴다는 것이다. 단계를 밟아가며 차근차근 1군에 진입하는 선수들이 겪지 않는 문제점인 것이다. 우리는 항상 아카데미에서 뛰는 소년들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그들을 1군으로 끌어 올린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들이 이후 겪게 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이해해줄 수 있어야 한다.


1군에서 시행하는 훈련은 어린 선수들을 가르치는 것과 다르다. 1군 훈련은 항상 다음 경기를 목표로 진행되며 경기 준비에 맞춰진 훈련이 반복된다. 선수들은 경기를 뛰고 회복하고 다시 경기를 준비하는 사이클을 반복한다. 따라서 1군과 같이 훈련하는 어린 선수들은 또래들과 함께할 때 수행하는 훈련들(크로스, 마무리, 다양한 포지션에 대한 적응력)을 하지 않는다. 


나는 마커스 래쉬포드가 지금부터라도 부진하지 않길 바란다. 래쉬포드는 지난 2월 미트윌란과의 유로파 리그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군 선수로 활약 중인데 그는 충분히 1군 경기를 소화할 자격을 갖춘 뛰어난 어린 선수였다. 현재 래쉬포드는 9월 24일에 있었던 레스터 시티와의 경기 이후 골을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공격수들처럼 골을 넣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래쉬포드의 마음을 흔들 것이다. 어린 선수에게 침체기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나 역시도 결코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블랙번 로버스에게 타이틀을 내줬던 1994/1995시즌, 나의 경기력은 좋지 못했다. 종아리와 햄스트링 부상이 몇차례 있었고 1993/1994시즌보다 경기 출전 횟수가 줄어들었다. 나는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 기본으로 돌아갔다. 나는 경기력 향상을 위해 집중해야할 부분에 대해 추가 훈련을 실시했다.


1군 경기를 뛰어보면 크로스를 시도할 기회가 단 2~3차례 뿐인 날, 득점 기회가 고작 1번뿐인 날이 있다. 나는 그 얼마없는 상황을 확실히 결정짓기 위해 항상 준비가 되어있어야 했다. 나는 단 한번의 터치만으로 득점 기회를 만드는 훈련, 오른발 훈련 등 보다 날카로워지기 위한 훈련을 브라이언 키드 코치와 진행했다.


브라이언 키드가 팀을 떠났다고해서 훈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스티브 맥클라렌, 르네 뮬레스틴과도 마찬가지 훈련을 이어갔다. 드리블을 가다듬고 마무리 연습하는 것과 같은 간단한 훈련이었다. 몇시간씩 할 필요도 없다. 일주일에 3차례 10분씩만 연습해도 다시 감각이 정교해질 수 있다. 이것은 (더 발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피치 밖에서 1군 선수가 일반적으로 보내야할 생활 리듬이다.


마커스는 언젠가 자신의 최적 포지션인 센터-포워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1군 선수로 더 정착하는 것이 우선인 시기다. 래쉬포드는 자신이 측면에서 뛰는 시간도 보낼 필요성이 있다는걸 받아들여야 한다. 래쉬포드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어린 선수들은 자신을 독려할 수 있어야 한다. 1군은 경기 이후 첫 훈련에서 경기를 뛴 선수들에게는 휴식을 주고 경기를 뛰지 않은 선수들에게는 가벼운 피지컬 훈련을 시킨다. 경기가 끝난지 이틀이 지나면, 1군은 항상 다음 경기를 준비한다. 


아카데미와 다른 1군의 훈련 체계 속에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마커스는 아주 뛰어난 재능이다. 미트윌란과의 경기를 앞둔 시점에 맨체스터 시티 U-21팀과의 경기에서 활약하던 래쉬포드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전체적인 팀 퍼포먼스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하프-타임에 선수들에게 거친 말을 했지만 그 속에서도 래쉬포드는 빛이 나던 선수였다.


며칠 후에 루이 반 할과 나는 1군 훈련에서 래쉬포드가 간단한 기술로 선수를 제치는 모습을 보면서 1군에서 뛸 준비가 되어있음을 느겼다. 래쉬포드는 앙토니 마시알의 부상으로 1군 데뷔전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었는데 당시 래쉬포드가 (앙토니 마시알의 부상으로 생긴) 기회를 잡기위해 경기 준비과정에서 서두르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래쉬포드가 기회를 꽉 붙잡고 유로2016 명단까지 이름을 올린 것은 정말 대단한 성과였다. 하지만 그런 도약을 이뤄낸지 10개월 후에 다시 한 번 기본으로 돌아가는건 결코 손해보는 일이 아니다. 모든 10대 선수들처럼 래쉬포드도 여전히 성장할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다.




출처 : http://www.telegraph.co.uk/football/2016/12/09/marcus-rashfords-goal-drought-natural-gets-back-basics-can/






by Ryan Giggs


내가 이런 말을 하는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5월에 있었던 유로파 리그 결승전에서 나는 위르겐 클롭이 이끄는 팀이 승리하길 원했다. 물론 리버풀이 우승 트로피를 가지고 퍼레이드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리버풀이 유럽 대항전에 출전하지 못하는 것이 리그 경기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이자 그 곳에서 오랫동안 선수로서 뛰었다. 나는 살포드에서 성장했고 당시 리버풀은 잉글랜드 최고의 팀이었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유럽 정상의 자리까지 올랐던 구단이었다. 리버풀의 뛰어난 퍼포먼스에 가려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이 어떤 느낌으로 살았는지 잘 알고 있다. 시간이 흘러 유나이티드가 리버풀보다 더 성공적인 구단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안필드에서 승리하는 것만큼 짜릿한 것은 없다.


세비야와의 결승전 경기를 보면서 나는 리버풀이 유럽 대항전에 참가하지 않고, 여름에 보강이 적절하게 이루어진다면 프리미어 리그 우승에 도전할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클롭은 단 1년만에 잉글랜드 경기 스타일이 요구하는 사항들에 대해 적응했고 선수들은 클롭이 추구하는 경기 방식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올시즌 리버풀은 주말 경기를 준비하는데 방해가 되는 주중 경기가 없다.


루이 반 할은 독일에서 감독직을 수행한 경력이 있으며 수많은 독일 감독들이 주말 경기를 위해 전술적인 준비를 주중에 심도있게 진행한다고 수석코치인 나에게 말해줬다. 만약 리버풀이 유로파 리그에서 우승했다면, 그들은 지금 챔피언스 리그 무대를 누비고 있었을 것이다. 8위로 시즌을 마감한 상황에서 유로파 리그 결승전까지 패배한 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다행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리버풀은 온전히 주말 경기에 집중할 수 있다.


리버풀이 마지막 우승을 이뤄낸지 27시즌이 지났다. 1967년부터 1993년까지 우승하지 못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26년 기록을 뛰어넘게 되었는데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압박감은 더 커질 뿐이다. 알렉스 경이 우리를 우승으로 이끌기 전까지도 나는 유나이티드에서 우승에 대한 비슷한 압박감을 느꼈다. 타이틀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구단 선수들과 심지어 팬들까지도 정말 우승이 가능한가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올해 리버풀은 우승 경쟁할 수 있는 모습을 갖췄다. 나는 현역시절에 리버풀이 과거 리그를 지배했던 경력이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우승을 차지할 경우 연달아 우승에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궁금했었다. 유나이티드가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리그를 지배했지만, 현재는 한 구단이 리그를 지배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물론 리버풀은 1회 우승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우승을 원하겠지만 말이다.


알렉스 경은 리버풀 상대로 반드시 이겨야한다고 말했다. 물론 우리가 리버풀에게 항상 승리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리버풀과의 경기가 최근 경기력과 상관없이 치열하게 싸워야하는 경기라고 인식한 것은 분명했다. 1992년 4월 우리는 안필드에서 패배했다. 경기 종료 후 리버풀 팬 한 명이 나에게 싸인을 요청했다. 그는 나에게 싸인을 받고서 즉시 내 앞에서 사인을 찢으며 유나이티드가 결코 리그 우승을 하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당시 나는 18살이었고 그가 찢어진 싸인을 아직도 가지고 있길 희망한다. 


최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안필드에서 경기했을 때, 나는 스카이스포츠의 MNF 펀딧으로 안필드를 방문했다. 안필드는 내가 자유롭게 방문하던 곳이 결코 아니었다. 안필드의 메인 스탠드에서 경기를 관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상당히 인상 깊었다. 안필드에서 유나이티드와 똑같이 수십년간 구장의 상업화와 맞서 싸워온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결코 안필드의 유명 인사가 될 수 없을텐데 이번 안필드 방문에서 구단 직원들은 나에게 상당히 친절했고 존중심을 보여줬다. 각자의 양측 구단에 대한 충성심을 떠나서 리버풀이 그렇게 멋진 모습을 보여준 것을 칭찬하고 싶다. 나와 개리 네빌이 안필드 주차장에서 폭언을 들었다는 보도가 있던걸로 아는데 보도된 것보다 훨씬 더 심한 말도 들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리버풀 관계자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보아하니) 어쨌든 나는 그런 폭언이 내가 아닌 네빌을 향한 것이라 확신할 수 있다! 


스티븐 제라드 이적 후 빅스타가 없는 리버풀 경기를 보는 것이 흥미롭다. 필리페 쿠티뉴는 뛰어난 재능이고 조던 헨더슨은 주장직을 이어갈만큼 잘해주고 있다. 헨더슨은 정말 좋은 사람이자 헌신적인 프로선수처럼 보인다. 제라드가 떠났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은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한 개인이 모든 관심을 받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팀에게 좋은 현상일 수도 있다.


다방면에서 2005년 로이 킨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난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수년간 로이 킨은 피치 위에서 2인분 이상을 해주던 선수였다. 킨이 구단을 떠났을 때, 다른 선수들이 그 빈 자리를 채워야만 했다. 현재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의 차이는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을 내부에서 찾았는가, 외부에서 찾았는가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누가 감독이든 제라드는 리버풀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 제라드는 리버풀을 떠났고 리버풀을 상징하는 그 자리에는 클롭이 위치해 있는 것 같다.


구단 내에서 제라드의 역할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제라드는 위대한 선수였다. 유나이티드에서는 알렉스 경보다 위대한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은 서로 다른 구단이니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는 것이 맞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리버풀이 다이나믹하게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리버풀은 20골 이상을 넣어줄 수 있는 스코어러가 없다. 사디오 마네 혹은 다니엘 스터리지는 내가 틀렸다고 기록으로 말해줄 수도 있다. 허나 분명한 것은 리그 우승을 위해선 20골 넘게 넣어줄 선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근 리그 우승을 차지한 모든 구단에는 20골 이상 넣은 선수가 있었다 : 제이미 바디, 디에고 코스타, 야야 투레(물론 메인 스트라이커는 세르히오 아게로지만) 로빈 반 페르시까지.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리버풀의 골키퍼는 리그 정상급 수준이 아니라 생각한다. 


아마 리버풀과 관계된 사람들은 내가 리버풀의 우승 가능성에 대해 "우승할까봐 걱정스럽다."고 말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 전에 리버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18번 우승부터 하고 오라고 말했었다. 20년이 지났고 유나이티드는 총 20번 리그 우승을 기록하게 되었다. 지금 내 주변 사람들은 그 관계가 다시 역전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출처 : http://www.telegraph.co.uk/football/2016/10/28/ryan-giggs-column-why-i-fear-this-could-be-liverpools-year-in-th/



by Ryan Giggs


학생, 견습생, 퍼스트팀 선수, 코치, 임시감독, 수석코치로 29년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14세 이후 처음으로 그 위대한 구단을 떠나 생활하고 있으며 멋진 수년간의 생활을 되돌아보고 있다. 알렉스 퍼거슨 경은 나의 커리어를 지도했고 축구 선수로서 나의 본능은 언제나 앞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다가올 트레이닝 세션, 다가올 경기, 다가올 다음 도전과제를 응시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생활은 완전히 다르지만, 나는 경기장을 떠나 휴식을 취하는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 경기장에서 떨어져 회상할 시간, 새로운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유나이티드에서 경기하는 것, 유나이티드에서 지도자 생활을하는 것은 압박감이기도 했다. 일부는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내가 다른 곳으로 떠나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했다고 주장하지만, 올드 트래포드보다 더 큰 구단이 어딨는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처럼 매경기 승리할 것을 기대하고, 매시즌마다 새롭고 재능있으며 열의가 가득찬 젊은 선수들이 주전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도전하는 구단은 전 세계를 통틀어 얼마 없다.


나는 언제나 유나이티드의 팬이었다. 1987년 11월 29일 나의 14번째 생일날 알렉스 퍼거슨 경이 집으로 직접 찾아와 계약하기 전부터 말이다. 당시 나는 올드 트래포드에서 경기를 볼 수 있다면 어느 구역이든 가리지 않고 티켓을 구매했다. 물론 주로 스트렛포드 엔드에서 경기를 관전했다. 이제는 10살이 된 아들 제크와 유나이티드 경기를 본다. 맨체스터 더비전을 나는 아들과 함께 디렉터 박스에서 관전했다. 나는 스트렛포드 엔드를 가리키며 내 아들에게 내가 옛날에 저기서 경기를 지켜봤다고 알려줬다.


나는 모든 트로피를 알렉스 퍼거슨 경과 함께 들어올렸다. 13차례 리그 타이틀, 2차례 챔피언스 리그 우승, 4번의 FA컵, 4번의 리그컵 모두를 알렉스 경과 함께했다. 그리고 2013년 알렉스 경의 은퇴 이후 유나이티드 팬들이 걱정하는 사항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나는 팬들이 우려하는 그 시기를 구단과 함께 했던 사람이다. 데이빗 모예스 시절에는 선수 겸 코치로 루이 반 할과는 수석 코치 관계로 근무했다. 나는 지난 3년의 시간이 팬들에게 상당히 고된 시간이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알렉스 경이 감독직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던 장소까지 기억한다. 알렉스 경은 구단이 공식발표를 하기 하루 전에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캐링턴에서도 상당히 많은 대화를 나누는 관계였으나 공식적인 시간이 지난 이후 전화가 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알렉스 경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것을 알게되자 나는 먼저 이 생각부터 들었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39살 먹고도 그 생각이 먼저였다.


알렉스 경은 전화를 통해 나에게 은퇴를 결심했다고 알렸다. 2001년 첫번째 은퇴 선언을 한 이후로 나는 매 여름마다 언제든지 알렉스 경이 팀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말을 들어보니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전화를 마치고서 굉장히 슬픈 감정이 올라왔다. 알렉스 경은 오랫동안 내 인생의 일부를 차지했던 인물이다. 그 분의 은퇴는 몇 달간 완전히 나를 새로운 세계로 몰아넣었다. 프리시즌을 위해 소집되었으나 더 이상 구단에는 알렉스 경이 없었다. 크리스마스에도 마찬가지였고. 우리 모두의 삶에 있어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분이었다. 조직을 체계화시켰던 분이고 우리를 길러내셨으며 동기부여까지 해주셨던 분이 바로 알렉스 경이었다.


선수 생활 말년에 알렉스 경은 사무실로 나를 자주 불렀다. 그리고선 나에게 특정 경기에 투입시킬 생각이니 거기에 맞춰서 스스로 몸상태를 조절하고 있으라고 전달했다. 또한 여러가지 사항에 대해 논의했는데 나를 비롯해 게리 네빌, 리오 퍼디난드같은 고참들을 불러 팀 트레이닝에 대해, 경기를 어떻게 펼칠지에 대해, 상대팀에 대해, 선수 선발에 대해 여러가지 논의를 진행했다. 젊었던 시절보다 더 우리의 의견을 들어보려고 했다. 오해는 하지말자. 구단의 보스는 단 한 명 뿐이다. 






데이빗 모예스가 알렉스 경을 대체하기 위해 선임되었고 그는 나를 불러 선수 겸 코치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나는 UEFA 프로 라이센스 과정을 밟고 있었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선수 겸 코치직을 수용하는 것이 자연스런 변화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나는 선수로서 더 많은 기여를 하고 싶었고 선수의 신분일 때야 다른 것에 집중하지 않게 된다. 선수 겸 코치였지만 나는 어떠한 트레이닝 세션도 진행하지 않았다. 데이빗이 트레이닝 세션을 진행했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필 네빌이나 스티브 라운드가 대신 트레이닝 세션을 지도했다.


1월에 나는 좀처럼 1군 경기를 뛰지 못했다. 경기에 나서지 못한 것은 나한테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물론 40세 선수가 매주 경기에 나설 수 없다는걸 받아들인 상황이지만, 나는 정말로 경기에 뛸 준비가 된 상태였다. 그리고 팀도 경기를 잘하고 있지 못했다. 나는 그 시간이 힘들었다. 프로답게 행동했지만 경기를 뛰지 못했던 그 순간도 즐겼다고는 말할 순 없다.


루이를 처음 만난 날, 우리는 바로 대화를 진행했다. 대화가 막 30분 지났을 무렵 그는 나에게 수석 코치 자리를 제안했다.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한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하더라. 그것은 수석 코치를 하기위해 내가 은퇴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루이는 나를 위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루이가 그렇게 말한 순간, 나는 그것이 옳다고 느꼈다. 지난 2년간 나는 루이에게서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루이는 정말 철저한 사람이었다. 첫번째 시즌에 팀 구성원 모두가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 알고 있었고 우리는 좋은 발전을 이뤄냈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시즌 길을 잃었다. 전적으로 루이만의 실패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모두가 비난을 나눠야만 한다.


우리가 알렉스 퍼거슨 경과 함께 4경기를 남긴 상황에서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던 2013년 5월로 돌아갔다고 가정하자. 그 때 누군가가 나에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리그 우승 경쟁에 참여하지도 못할 순간이 올 것이라 생각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나는 '절대로 그럴리 없다'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우리는 상당한 조직력을 갖춘 팀이었고 재정적으로도 아주 풍족한 구단이다. 또한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팀이기도 하다.


1970~1980년대 장기간 성공을 거둔 리버풀도 그 성공을 지속하기 위한 과정에서 그런 단계까진 도달하지 못했다. 유나이티드가 마지막 타이틀을 따낸지 고작 3년 지났을 뿐이다. 1974년 강등당했던 것처럼 구단이 곤경에 처한 상황은 아니지만, 이전까지 유지되고 있던 기준이 지속되지 않고 있는 것도 분명 사실이다. 


알렉스 경도 3시즌간 리그 타이틀 없이 보냈던 시기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2007년부터 2009년까지 3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정상의 자리로 돌아왔다. 팀을 다시 잉글랜드 정상으로 되돌려놓는 것은 조세 무리뉴의 과제이다. 하지만 앞으로 과거의 유나이티드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다.


나는 알렉스 경이 떠난 이후 하락세가 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반응에 동의하지 않는다. 당시 우리는 승점 11점 차로 프리미어 리그를 우승했다. 당시 구단에는 수많은 위너(winners)와 강한 개성을 가진 선수들이 여럿 있었다. 나를 비롯해 리오, 네마냐 비디치, 파트리스 에브라 같은 선수들 말이다. 영입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우리도 젊고 의욕이 가득한 유나이티드의 위닝 멘탈리티를 가진 선수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을 것이다.


그런데 데이빗 모예스의 첫번째 여름 보강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데이빗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가 스쿼드를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대한 내부 지식없이 부임했다 : 어느 시점에 특정 선수에게 휴식을 줘야하는지, 어떤 선수가 어떤 경기에 적합한지, 어떤 선수를 내보내야하는지, 어떤 선수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줘야 하는지 같은 케이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 상태로 감독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물론 그 관리 속에서 살아온 우리들이 어느 정도까지 도와줄 수 있던 사항이지만, 감독 스스로도 시간이 흐르면서 관리법에 대한 혜안을 터득할 수 있어야 한다. 





펠라이니 영입은 8월 이적시장 데드라인에 근접해서야 이뤄졌다. 당시 구단은 여름에 단 1개의 메이저 딜을 성사시켰는데, 우리에게는 2~3명의 빅네임 영입이 필요했다. 영입이 지지부진했던 것부터 상황이 순탄치 않을 것이란걸 암시한 듯하다. 유나이티드는 이적시장 마지막 순간에도 선수를 구매하곤 했다. 2008년 디미타르 베르바토프를 영입했던 것이 떠오른다. 하지만 2013년 당시 영입은 다소 패닉 바이였다.


알렉스 경이 항상 베스트11을 마음에 품고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매 경기마다 어떤 팀을 꾸려서 나가야할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몇주 앞둔 상황에서부터 그에 대한 계획을 옮겼다. 허나 데이빗에게는 그런 정보가 없었다. 그는 완전히 백짓장 위에서 시작했고 첫시즌의 상당한 시간을 베스트11 조합을 찾는데 썼다. 당시 최고의 기록은 2013년 12월의 6연승이었다. 우리는 꽤나 안정적인 팀을 만들어냈지만 부상이 발생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데이빗과 함께한 트레이닝 세션은 아주 훌륭했다. 모든 선수들이 데이빗의 훈련을 즐겼고 훈련 속 경쟁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는 알렉스 경 때부터 항상 유지되어온 특징이기도 하다. 아마 다른 무언가가 데이빗이 자리를 잃는데 더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사람들은 알렉스 경 지휘 속에서 올드 트래포드가 아우라를 뿜어냈다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유나이티드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내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는 유나이티드 소속이 아닌 다른 선수들로부터 아우라가 느껴진다는 얘기를 들었다. 상대팀 선수들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두들겨 맞지않고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란 식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웨일스 대표팀에서 우리가 좀처럼 공을 소유하지 못한 날이 있었다. 당시 나는 드레싱룸에서 불만을 토로하면서 우리가 제대로 경기를 펼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때 개리 스피드는 "올드 트래포드에서 뛰는 느낌이 딱 이렇다." 라고 말해줬다. 그 때의 그 말은 나에게 올드 트래포드가 다른 팀 선수들에게 어떤 장소여야하는지에 대한 통찰로 남아있다. 



출처 : http://www.telegraph.co.uk/football/2016/10/21/sir-alex-ferguson-left-a-huge-void-at-manchester-united-but-dec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