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Jonathan Wilson


루이 반 할의 피치 밖 독특함은 팬들에게 즐거운 소재가 되고 있지만, 경기장 내에서 하품을 만들어내면 그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나가는 문을 열게만들 것이다. 데이브 섹스턴이 그랬다. 



그들은 현재 오직 승리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경기를 이기면 모든 죄악이 (형편없는 경기력) 잊혀질 것이라는게 그들의 주장이다. 뭐,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올드 트래포드는 점차 점유율을 바탕으로 하는 반 할의 프로세스의 실망스러움을 표출하기 시작했고 무득점 무승부가 쌓여지면서 팬들은 "공격! 공격! 공격!"을 외치고 있다. 그리고 그 외침이 들리는 시간대가 점점 앞으로 당겨지고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란 클럽이 재미없는 축구를 펼친다는 이유로 감독을 짜른 적이 없었느냐? 그건 아니다.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이끌었던 데이브 섹스턴은 4년의 시간동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단 하나의 트로피도 안겨주지 못했으나 그는 팀을 FA컵 결승전으로 이끌었고 팀은 리그에서 2위를 차지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는 7연승을 거두고도 섹스턴은 감독직에서 물러나야만하는 다소 억울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를 해고하기로한 결단은 1980/1981시즌이 끝나기 3개월 전에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고 전해진다.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5경기 동안 무득점이었고 이후 레이 윌킨스의 뛰어난 활약이 섹스턴의 상황을 어느 정도까지는 호전되게 만들었지만 이미 그 때는 섹스턴을 짜르기로한 결정이 내려지고 나서였다. 


겉보기에도 섹스턴과 반 할은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다. 섹스턴은 항상 대중에게 서투른 감독이었고 질문에 답하기 전에 마른 침을 한 번 삼키는 자신의 버릇을 흉내내는 저널리스트들보다 선수들과 대화하는 것을 과하게 선호했다. 반면에 반 할의 컨퍼런스는 항상 강렬하다. 그가 언제든지 특이한 언행을 취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인식이 이미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다. 또한 섹스턴은 자신의 전임 감독들과 동료 감독들과의 비교에 상당히 골머리를 앓았던 인물이었다.


1977년 여름, 토미 도허티를 대체하는 인물이 누가되었건 그 사람은 상당히 힘든 도전에 직면했어야만 했다. 대담하고 자신만만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이끌었던 도허티는 자신의 성격에 맞는 포메이션, 그는 담대하게도 4-2-4 포메이션을 사용했고 고든 힐과 스티브 코펠을 앞세워 FA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도허티는 클럽의 물리 치료사의 아내인 매리 브라운과 불륜을 저지르며 경질되고 말았다. 도허티와 섹스턴은 너무나도 달랐던 인물이었다. 도허티와 달리 섹스턴은 예민하고 지성적이며 차분했던 인물이었다. 


섹스턴은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머뭇거리는 인물이었지만, 저널리스트들은 도허티를 자신의 사무실에서 저널리스트에게 와인까지 대접하는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저널리스트를 환대할수록 그들은 말콤 앨리슨과 존 본드가 이끌었던 맨체스터 시티 측에서도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마누엘 펠레그리니가 시티에 남아있는한 반 할은 항상 금요일에도 맨체스터를 대표하는 치열한 결투를 벌여야하고 적어도 그의 독특한 행동은 데이빗 모예스보다 더 많은 기삿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섹스턴은 앨리슨과 본드에 비해서도 조심하는 성격이었고 매사 신중했던 인물이었다. 그 결과 그의 팀은 구조적인 측면을 너무나 강조하는 스타일이 되어버렸다. 1977/1978시즌 앞서 언급했던 고든 힐은 36경기에서 17골을 기록했지만, 수비 가담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더비 카운티로 팀을 옮겨야만 했다.


그러나 여기서 감독의 성향만으로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1977/1978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67골을 기록하면서 리그 내 득점 순위 5위였는데 마찬가지로 실점 역시 63골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보다 더 많은 실점을 기록한 팀은 고작 6팀에 불과했다. 그 다음시즌에는 60골을 기록했고 63골을 실점했다. 1979/1980시즌 리버풀과 승점 동률로 시즌 마지막 경기를 시작했지만 리즈에게 1:4로 패배했다. 유나이티드는 시즌을 65득 36실 성적으로 리그 2위로 마감했다. 하지만 섹스턴의 마지막 시즌인 1980/1981시즌에 득점은 51득점 (36실점) 으로 더욱 나빠졌고 그는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섹스턴의 가장 성공적인 영입이라 거론되는 고든 맥퀸은 자신이 수비 코치인 줄 알았다고 우스갯소리를 남기기까지 했다.


대중에게 비춰지는 섹스턴의 이미지는 "지루함, 과도한 분석, 그에 따른 너무나 복잡한 전술 설정" 으로 남아있다. 또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선수 생활을 보내지 않았다는 부분 역시 외부인으로서 그의 이미지를 굳히는데 한몫 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스코틀랜드 감독은 기꺼이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런던 태생의 인물에게는 아직까지 보수적이었던 것이다. £825k을 지불하며 데려온 레이 윌킨스 역시 이적 초기에는 따가운 시선을 받았었다.


1980년 마틴 에드워즈가 회장의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당시 이적 시장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여러 부침을 겪었다. 섹스턴은 이적료 최고액을 지불하며 코벤트리의 골키퍼 짐 블라이스를 영입하려 했는데 선수가 메디컬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케빈 맥벗은 브리스톨 시티의 잔류하고자 유나이티드행을 거절했다.


지역 출신 스트라이커로 기대를 모았던 앤디 리치는 오늘날 대니 웰백처럼 브라이턴으로 떠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거기서 얻은 영입자금 £1.25m으로 개리 버틀스를 영입했지만 그는 이적 첫시즌에 단 한골도 기록하지 못했고 머지않아 다시 노팅엄 포레스트로 돌아갔다.


힐을 대체하기 위해서 영입된 미키 토마스는 너무나도 긴장한 나머지 트레이닝장으로 출근하는 첫날부터 운전사고를 내버렸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겁먹은 모습만 보여주고 말았다.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에서 영입한 세련된 중앙 수비수 니콜라 요바노비치는 잉글랜드의 술문화와 잉글랜드식 축구에 당황한 나머지 1년만에 팀을 떠났다.


섹스턴은 공을 측면으로 보내고 박스로 침투하라는 도허티의 철학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 유나이티드 팬들은 도허티가 보여준 방식의 축구가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섹스턴이 자신의 전술적 철학을 설명할수록 사람들은 섹스턴이 너무나 보수적이라는 생각만 했고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동시에 섹스턴은 이적시장에서의 삽질로 더욱 악화된 여론과 싸워야만 했다. 섹스턴을 짤라야한다는 울림은 아주 분명했다.


현재 반 할의 행동이 뻔하다거나 (예측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거나) 외부적으로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고 발생한 문제는 없다. 다만 올드 트래포드의 과거를 돌아보면, 경기 스타일은 충분히 감독을 경질시킬 수 있다.




출처 : http://www.theguardian.com/football/blog/2015/dec/03/louis-van-gaal-manchester-united-boring-sack



by Jonathan Wilson


현재 아르센 벵거는 66세이고 그 역시도 영원할 수는 없다. 12년 전 리그 우승을 달성한 이후로 그는 리그 타이틀을 거머쥔 적이 없다. 은퇴 이전에 트로피를 차지하는 것은 일종의 구원이 될 수 있겠지만, 어쩌면 그의 아스날 임기 후반기는 표류하는 시기로 역사에 기억될 위험에 놓여져 있기도 하다. 아스날의 라이벌들이 헤메고 있는 현재 아스날은 우승하기 가장 좋은 적기를 맞이하고 있다. 벵거도 알고 있고 모두가 알고 있다. 일요일에 있을 레스터 시티전은 정말 중요해졌다.


만약 아스날이 레스터에게 패배한다면 레스터와의 격차는 12경기가 남은 상황에서 8점으로 벌어진다. 12경기에서 8점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승리한다면 차이는 2점으로 좁혀지고 다시 4팀이 우승을 향해 달리는 판국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타이틀레이스는 단순한 산술적인 것 혹은 타이틀 레이스에 대한 세부 사항만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 아스날이 최근 흔들리면서, 지난 10년간 누적된 아르센 벵거의 매니지먼트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축구의 관습적인 지혜가 이야기해주듯이, 보통 경험이란 긍정적인 것이다. 경험은 감독이 특정 상황에 어떠게 반응해야하는지에 대해서 해답을 알려준다. 감독의 판단에 대한 선례들이 쌓이면서 하나의 책이 되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게 된다. 우리는 감독의 주름살과 흰머리를 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말년의 스타일


문학 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자신의 생을 마감하기 이전에 '말년의 양식'이란 개념으로 유명세를 탔다. 말년의 양식이란 예술가가 노쇠화에 따라 자신의 신체 기능에 대해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에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이야기한다. 2006년 발간된 그의 저서 '말년의 양식에 대하여' 에서 사이드는 말년의 작품들로 미학적 노력을 통해 그들의 인생을 완성한 인물들 : 램브란트, 마티스, 바흐, 바그너 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이드는 말년의 양식이 '이전의 것들과 조화롭지 못하고 평화롭지 못한 긴장 상태를 보이며 비생산적인 다작'을 한 인물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전자의 완벽한 예시로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The Tempest)를 이야기할 수 있으며 프로스페로가 예술가가 가지는 창조성의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면, 입센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When We Dead Awaken) 는 그것과 완전히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마지막 작품을 통해 기존의 작품들이 다시 평가받도록 만들었다.


2014년 월드컵에서 보여준 루이 반 할의 작품은 입센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백3 시스템과 역습 전술로의 변화는 피할 수 없었던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만큼 반 할의 기존적인 철학과는 정반대의 색깔이었다. 지난시즌 백3 시스템과 마루앙 펠라이니를 딥-라잉 타깃맨으로 활용했으나 올시즌에 다시 자신의 오리지널 스타일로 되돌아온 것은 흥미로운 점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사이드는 성공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 정치판과 유사하게 축구계 역시 커리어는 보통 실패로 끝나고 만다. 미국의 니콜라스 델반코가 2011년에 출판한 저서 '영속성 : 노년의 예술에 대하여(Lastingness : on the Art of Old Age)'에는 소포클레스, 예이츠, 모네, 리스트처럼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번창했던 인물들과 사울 벨로우, 제임스 볼드윈, 노먼 메일러처럼 반복에 갇혀 생동감과 창조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소개되어 있다.





셀프-패러디에서의 표류


하락 곡선을 그리는 과정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한 클럽에서 오랫동안 머무르는 감독들일 것이다. 1981년 브라이언 클러프는 자신의 수석코치인 피터 테일러와 결별한 이후 변해버렸다. 또한 그해 여름 오랫동안 함께한 지미 고든 코치와도 결별했고 (은퇴) 자신이 재정적으로도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일부 자금이 시티 그라운드의 새로운 스탠드를 짓기 위해 빠져나간 돈을 갚기 위해 쓰여진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통합 £2.7m을 지불하며 데려온 저스틴 파사누, 이안 월러스, 피터 워드가 모두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노팅엄 포레스트는 이적시장에서 트레버 프란시스와 같은 선수들을 영입할 수는 없었는데, 클러프는 래리 로이드나 캐니 번즈같은 선수들을 구매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70년대 후반의 위대한 팀 노팅엄 포레스트, 4년의 시간 사이에 승격을 이뤄내고 리그 우승과 2번의 리그컵, 2번의 유러피언 컵 우승을 차지했던 그 팀은 다른 클럽들이 포기했던 다루기 까다로운 개성의 소유자, 도박꾼, 어디에선가부터 계약해지된 알콜 중독자 같이 이상한 녀석들로 가득했었다.


그러나 80년대부터 클러프의 스쿼드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클러프와 절친했던 테일러는 "나는 특정 선수가 말썽꾸러기란 사실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실제 따뜻한 사람들이다. 클러프는 나와 달랐던 것 같다. 그는 천성이 곧은 사람을 원했던 것 같다." 라고 말한다. 어쩌면 테일러의 부재가 클러프를 변화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고집이 쎄고 표현이 아주 분명한 파사누와의 관계가 클러프를 지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포레스트 선수들은 변했다. 70년대 급조한 술꾼들은 80년대 깔끔한 헤어스타일과 패스를 장착한 신사로 변해버렸다.


또한 클러프의 야망 역시 변했다. 그는 트로피를 원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모든 권모술수를 썼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80년대 클러프는 깔끔한 축구를 추구하는 것에서 만족하는 인물로 바뀌었다. 포레스트란 클럽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생각한다면, 꾸준하게 6위에 들어가는 것 역시 뛰어난 성취라고 할 수 있으나 70년대 클러프는 그런 제한선들을 모조리 깨부수던 인물이었다.



야망의 축소


클러프와는 매우 다른 성격을 지닌 사람이나 벵거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온 것일 수도 있다. 벵거의 위대한 팀은 다이아몬드 원석같은 탄탄한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스타디움 건설로 인한 자금 제한이 생긴 이후, 아스날 선수라는 특징에 대한 아주 분명한 견본이 형성되었다 : '키가 작고 기술적인 능력을 갖춘 창조적인 미드필더들' 지금의 아스날은 80년대 포레스트처럼 아주 단정한 커트를 하지는 않으나 분명히 아스날스러운 헤어컷은 존재한다. 또한 그 때의 포레스트처럼 자신들보다 더욱 풍족한 자원을 갖춘 클럽들과 마주하였을 때, 감독이 그리는 기술적으로 완성된 축구를 구사하는 것에 대한 선호로 인하여 트로피를 어떻게 차지해야하는가를 거의 잊어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 또한 셀프-패러디의 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비평가 톰 비셀은 "모든 위대한 아티스트들은 끝내 자신의 스타일에 포로가 되어버린다" 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감독들이 비슷한 과정에서 똑같은 전철을 밟는 것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만든다. 어떻게 해야지 문제를 최고로 잘 풀어낼 수 있을까가 아니라 벵거는 "아르센 벵거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문제를 풀어낼 것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벵거는 과거부터 수없이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왔다. 그래서 그는 과거의 경험에 의존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위험한 것이다. 과거의 성공적이었던 것은 더 이상 성공적이지 못할 수도 있다. 현재의 문제가 과거의 문제와 닮았다는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상황을 다루는 환경이 달라진 것일 수도 있다. 그 결과 벵거는 점점 더 벵거스러워지고 과거의 성공 사례는 미래의 성공을 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알렉스 퍼거슨 경 같은 예외 사항들도 존재하지만, 이러한 이유들로 감독들이 세계 최정상의 자리에서 10년 이상 성공을 유지하기 어려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 속에서 대중과 미디어의 역할이 존재한다. 설사 벵거가 굉장히 독립적이고 잠재 의식이 충만한 사람이더라도, 벵거에게는 자신의 원칙을 깨라는 요구가 향한다. 만약 벵거가 지난 여름 홀딩 미드필더 영입을 위해 아스날의 이적료 레코드를 깼다면 그것은 수년간 대중의 목소리가 맞았고 벵거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완고함이 자리를 잡게 되었고 그것은 벵거 성격의 일부가 되어버렸으며 스스로를 영속시키게 되어버렸다.


스스로를 해체하기 & 입증을 위한 탐구


그러나 미묘한 것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클러프와 벵거가 변한 것은 어니스트 베커가 프로이트를 다시 읽으면서 '영웅-이상(hero-ideal)'을 개인의 자존감과 의미를 끌어내는데 있어서 활용하는 믿음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다. 그것들은 트로피를 위한 탐구에서 시작되어 경기 스타일을 향한 탐구가 되었다.


트로피가 관련없다는 말은 아니다. 지난 12년간의 저성과를 입증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벵거의 방식으로 리그를 우승하는 것이다. 만약 벵거가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그것 역시도 최소한 벵거의 방식대로 실패한 것이다 : 경기 접근법을 바구길 거부한 것, 큰 돈을 투자하길 꺼리는 것, 간결하고 기술적인 미드필더들을 기반으로한 철학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들 말이다. 


사무엘 베버는 이렇게 말했다. "의미를 추구하는 모든 행동들이 에고를 세우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이라면, 에고의 해체를 맞이하는 그 순간 에고가 철학의 의미를 이끌어냈던 깊은 곳에서 궁극의 지점까지 이끌어 스스로 해체되도록 만든다면 그것만큼 확실한 장악력을 보여줄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이 있을까?"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영웅-이상을 수정하는 것은 객관적이며 실체를 가지고 있는 트로피보다 주관적이며 덧없는 스타일에 집중하는 것으로 일종의 자기방어 메커니즘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2년 반동안 주요 영입을 하고 지난해 1월 맨체스터 시티 원정에서 주저앉은 상태로 경기를 펼치면서 2:0으로 이겼던 능력들은 벵거가 성과로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고 사이드가 말했던 인생의 노력을 완성하기 위한 것으로 움직이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http://www.theguardian.com/football/blog/2016/feb/11/arsenal-arsene-wenger-title-leicester


by Jonathan Wilson


"만약 감독이 바뀐다면?", "감독이 어느 시점에 바뀌는가?"의 질문에서 벗어난지는 한참 지났다. 지금 관심이 있는 것은 누가 다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이 되느냐이다. 지난 월요일에 있었던 슈루즈버리와의 FA컵 경기는 반 할의 올드 트래포드 임기를 끝내버릴 수도 있는 경기였다. 어쩌면 미트윌란과의 유로파 리그 경기에서 탈락한다면 그것도 또 하나의 사임의 시점이 될 수 있다. 지금 어느 누구도 다음 시즌에 반 할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직을 유지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체면치레를 할 수 있는 대회인 FA컵과 유로파 리그가 있지만 유나이티드가 그 대회를 병행함과 동시에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이 달려있는 리그 4위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알렉스 퍼거슨 경의 은퇴 이후로 벌써 3번째 수치스러운 시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축구판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오랫동안 머무른 리더를 곧바로 성공리에 대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이런 패턴을 겪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1910년 올드 트래포드 개장 이후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리그 타이틀 관점에서 가장 성공적인 잉글랜드 클럽이자 동시에 라이벌들보다 재정적으로 상당한 이점들을 누려왔었다. 그러나 주목할 부분은 1910년 이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차지한 19번의 우승 모두가 단지 3명의 감독 아래서만 이루어낸 성과라는 점이다.


1910년 이후의 모든 리그 영광이 단 3명의 감독에게서 나온 것, 이것은 일반적인 축구계 문화에서 익숙치 않은 그림이다. 감독에게 이토록 큰 힘이 주어지는 곳, 클럽의 철학을 넘어 자신의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곳은 축구계에 그리 많지가 않다. 스완지 시티가 최근 부상하게 된 것도 권력이 감독에게서 다른 곳으로 이양되었기 때문이다. 감독은 훨씬 더 좋은 제안에 이끌려 팀을 떠날 수도 있고 실패한 것으로 인식되어 팀을 떠날 수 있다. 그러나 팀의 권력이 감독에게서 다른 곳으로 이양되면 클럽은 대격변 없이 감독 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브리티쉬 문화는 감독만의 왕조를 건설하는 것에 대해 열망하는 모습이다. 모든 감독이 자기 클럽의 빌 샹클리, 맷 버스비, 돈 레비가 되어주길 바란다. 심지어 조세 무리뉴조차 첼시 감독으로 2번째 부임할 때 10년 계획에 대해서 언급했었다. 팀에 충성하는 젊은 홈그로운 선수들 무리, 또한 그들과 클럽이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 서로가 완벽하게 상호 이해를 하는 것, 거기에 추가가되는 영입은 언제나 클럽 운영의 이상향으로 여겨지고 있다. 실제로 그런 조화가 이루어지면 결과물은 정말 환상적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맷 버스비 경과 알렉스 퍼거슨 경 아래서 그런 경험을 했고 현재는 바이에른 뮌헨과 바르셀로나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쟁점은 그 영광의 순간 다음이다. 팀에 하나의 체계를 다져놓은 리더가 떠나면, 그 시스템도 사라지고 그 때부터 발생하는 사건들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다.



사례 : 맷 버스비 이후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68년 유러피언컵 우승 이후 이들이 더 할 수 있는게 있었을까? 자신의 3번째 위대한 팀을 이끈 버스비 경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이룰 수 있는 위대한 상은 모조리 수집했다. 유러피언컵을 최초로 우승한 잉글랜드 팀이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고 바로 10년 전 뮌헨에서의 비극이 있었기에 이는 더욱 두드러진 성과였다. 1969년 1월에 버스비 경은 은퇴 의사를 밝혔는데 이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59세였다. 그러나 그는 24년째 감독직을 이어오고 있었고 뮌헨에서의 트라우마는 계속해서 그를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버스비 경은 자신이 일종의 풋볼 디렉터로 존재하면서 그 밑에 감독을 두는 것을 구상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선택한 후계자는 윌프 맥기네스였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스팀 출신이며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 이후에 유스팀 코치를 담당하는 인물이었다. 맥기네스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첫시즌을 리그 8위로 마감했고 리그컵과 FA컵에서는 모두 준결승까지 진출했다. 


다음 시즌부터 조지 베스트는 점차 축구에 집중하지 못했다. 리그컵 준결승에서는 디비전3에 소속되어 있는 아스톤 빌라에게 패배했고 리그에서의 경기력은 형편없었다. 시티와 아스날에게 연패를 당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8위란 성적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드레싱룸에선 감독에 대한 반발, 파벌 형성에 대한 루머들이 있었으며 맥기네스는 다시 자신의 본래 직위였던 리저브팀 감독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약 2주 후에 그는 완전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났다.


맥기네스의 자리를 물려받은 인물은 바로 버스비 경이었고 유나이티드는 시즌을 8위로 마감했다. "유감스럽게도 모든 선수들이 윌프의 지시를 따르려하진 않았습니다. 모두가 윌프를 위해서 100% 헌신하진 않았던 것이죠. 우리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버스비 경이 다시 무대로 복귀하니까 모든 것이 단번에 달라졌습니다." 데이빗 새들러가 이렇게 말했었다.


맥기네스의 문제 중 하나는 역할에 대한 경계의 애매모호함 때문이었다. 버스비 경의 주장에 따르면, 맥기네스는 선수들과 '과도하게' 친밀했다고 한다. 그러나 버스비 경이 이사진으로 클럽에 여전히 존재하는 마당에 맥기네스가 감독으로서의 자신만의 권리를 정립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적 작업에서의 마지막 입김을 행사하고 일부 1군 선수 무리들과는 골프를 치는 관계까지 유지했던 버스비 경의 존재는 맥기네스만의 지위 확립에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1971년 여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레스터 시티의 감독인 프랭크 오파렐을 임명하는데 그는 버스비 경이 여전히 차지하고 있는 올드 트래포드의 감독 사무실을 자신에게 넘겨야한다고 주장했다. 베스트가 커리어 황혼을 태우는 시기였고 유나이티드는 시즌 첫 20경기에서 14승을 거두었으며 고작 2패만을 기록했다. 크리스마스 기간에 3경기 연속으로 무승부를 기록했으나 12월을 리그 1위로 마감했었다. 그러나 새해 첫날부터 웨스트 햄에게 0:3으로 패배하더니 역사상 처음으로 7경기 연속 패배까지 기록해 시즌을 8위로 마감했다. 이번에도 베스트는 다시 일탈하기 시작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형편없는 흐름은 새로운 시즌에도 이어졋고 개막 후 리그 12경기에서 고작 1승을 거두는데 그쳤다. 오파렐은 버스비 경이 특정 선수 이적을 (알렉스 스텝니, 윌리 모건) 방해했다고 주장했고 그와 버스비 경의 관계는 깨져버렸다.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10월에 토트넘에게 1:4로 패배한 이후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연례 행사에서 과음한 버스비 경이 오파렐의 아내에게 오파렐을 '자립심만 강한 골칫덩어리'라 표현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다가오는 월요일에 오파렐은 버스비 경에게 정확히 어떤 의미를 담아 이야기한 것인가에 대해서 물었는데 이에 버스비 경은 바비 찰튼이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 되어선 안되며 (오파렐이 영입한) 마친 부찬은 형편없는 플레이를 선보인다고 전했다. 오파렐 입장에서는 버스비 경이 팀에 과도하게 참견하고 있다고 느낄만 했다.


12월에 리그 꼴찌인 크리스탈 팰리스에게 0:5로 패배하면서 오파렐의 임기도 그렇게 종료되었다. 오파렐의 자리는 토미 도허티에게 넘어갔는데 팀은 1974년 2부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승격에 성공하며 1977년에는 FA컵 우승을 차지한다. 그러나 도허티는 그해 여름 클럽의 물리치료사 아내와의 불륜이 발각되면서 경질되고 만다.


버스비 경은 언제나 자신의 직접적인 간섭이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서 부인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버스비 경의 존재가 후임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느낀다. 1973년 클럽에서 완전히 떠나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버스비 경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이 자리를 떠날 수 있겠습니까. 전쟁의 폐허 후 잿더미 속에서 내가 일으켜세운 클럽, 뮌헨에서의 비극 이후에 내가 다시 만들어낸 클럽에서 내가 스스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라는 말입니까?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클럽이자 이 클럽을 위해서 나를 던지며 살아왔다고도 할 수 있는 내가 어떻게 떠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버스비 경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나는 것은 불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팀에게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한편 1974년 은퇴를 선언한 빌 샹클리가 훈련장에 오지 못하도록 조치한 리버풀의 상반된 대처는 유익한 결과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사례 : 발레리 로바노프스키 이후의 디나모





퍼거슨 경과 가장 유사한 인물을 뽑자면 바로 1973년부터 생을 마감한 2002년까지 디나모 키예프를 이끌었던 발레리 로바노프스키를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2번의 휴식 기간이 (1982~1984 & 1990~1997) 있었으나 그는 굉장히 성공적인 감독이었다. 12번의 리그 타이틀, 9번의 컵 대회 우승, 2차례의 컵-위너스 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소비에트 스타일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을만한 강한 압박 스타일을 정립했다. 그런 사람의 뒤를 잇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현재 디나모 키예프를 이끌고 있는 세르히 레브로프는 포스트-로바노프스키를 찾는 디나모의 침체기를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인물로 거론되고 있는데 그는 로바노프스키 이후 디나모가 임명한 8번째 감독이다. 디나모는 팀의 연속성을 이어가기 위해서 로바노프스키 감독 이후에 그의 아래서 직접 뛰었고 코치까지 지냈던 Oleksiy Mykhaylychenko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2004년 챔피언스 리그 3차 예선에서 트라브존스포르에게 홈에서 1:2로 패배하며 경질되기 이전까지 2차례의 리그 우승과 1번의 컵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그 경기 이후 디나모의 회장 이호르 수르키스는 이렇게 말했다. "(경질해야할 이유는) 분명해졌다. 디나모의 발전과 그 과정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몇가지 것들이 발견되었다. 나는 선수들의 신체적 피로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의 심리적인 부분, 기강에 있다. 우리는 트라브존스포르전에서 그것이 약화되어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지난해 경기장에서 80,000명의 팬들이 아스날에게 승리를 거둔 것에 대해서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망신살 뻗치는 경기를 펼쳤다!"


디나모는 로바노프스키 아래서 뛰었던 선수들에게 의존했다. 그럴만한 것이 로바노프스키 밑에서 뛰는 선수가 아니었다면, 당시 우크라이나 축구계에선 그리 명망있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샤흐타르 도네츠크의 성장과 디나모의 과도기를 겹치며 디나모는 4년의 시간동안 단 1차례의 리그 타이틀만 성취해냈다. 과거 디나모가 우크라이나를 평정했던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건 생각조차 못할 일이다.


디나모의 경기장 벤치에 왔던 모든 사람들에겐 '발레리 로바노프스키'란 수식어가 붙었고 결국에는 로바노프스키에 대해 계속해서 기억하는 것이 경기에 대한 온전한 집중을 못하게 방해한다는걸 인지 못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조제프 자보는 위기의 순간에 본인이 "이 위기의 상황에서 발레리 로바노프스키라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까지 생각해봤다는걸 인정했다. 그러나 로바노프스키의 가장 큰 장점은 계속해서 발전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것이 로바노프스키의 진정한 장점이었고 그렇게해서 약 30년간 최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던 것이다. 핀트를 잘못잡은 것이다. 


그래서 2007년 12월에 디나모는 결국 로바노프스키의 제자 내에서 감독자리를 구하는 것 대신에 외부인을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데려온 인물은 모스크바 출신이자 직접적으로 로바노프스키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유리 세민이다. 그는 처음으로 온전히 지휘봉을 잡았던 시즌에 바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친정팀 로코모티브의 제안을 받고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그 이후 또 다른 러시아인 발레리 가자예프가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 이후 클럽은 로바노프스키의 제자인 Alyaksandr Khatskevich에게 임시 감독을 맡겼고 또 다시 Mykhaylychenko가 다시 임시로 1달을 대신했다. 결국 디나모가 정식 감독으로 선택한 인물은 다시 로바노프스키의 제자인 올레흐 블로힌이었다.


블로힌은 아주 이상적인 로바노프스키 스타일의 선수였다. 디나모의 공격수로 19년을 보냈던 그는 로바노프스키 방식에 아주 철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블로힌은 고집스럽고 완고하며 아주 성공적이지 못한 감독으로 기억되며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2014년 4월, 18개월만에 그는 유감스럽게도 자리에서 물러나야했다.


디나모는 클럽 내부에서도, 클럽 외부에서도 로바노프스키의 성공을 이어갈 재목을 찾았으나 두가지 모두 로바노프스키 아래서 디나모 키예프가 경험한 성공을 유지하지 못했다. 현재 디나모를 이끌고 있는 감독은 로바노프스키의 3번째 위대한 팀, 1999년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전까지 진출한 팀의 키플레이었던 레브로프이다. 그러나 레브로프는 잉글랜드, 터키, 러시아에서도 선수 생활을 했었던 인물이다. 물론 블로힌의 코치로 일했으나 그의 철학은 우크라이나에만 머물러있지 않았으며 위르겐 클롭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많이 닮으려고 노력 중이다. 처음 지휘봉을 잡자마자 리그에서 우승을 했고 유럽 무대에서 보여주고 있는 퍼포먼스는 디나모가 정말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발생한 갈등으로 인해 샤흐타르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할 점이다)



전임자 영향력에 대한 우려


두가지 사례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문제점은 권위자의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존재감이었다. 버스비 경의 케이스는 아주 직접적인 경우였고 로바노프스키 같은 경우는 클럽이 과도하게 그 부분을 (전임자의 성과를 이어가야만 한다는 것) 인식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맥기네스와 오파렐이 시도한 모든 결정들은 버스비의 시각에서 재해석 되었다 : 두 감독의 결정이 버스비 경과 같은 노선을 달리고 있는가? 아니면 두 감독이 버스비 경에게 반기를 들고 있는가? 잇따른 디나모 키예프 감독들의 실패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감독에게는 기존 로바노프스키가 마련해놓은 하나의 진실된 길에서 벗어났을 때 발생하는 실패에 대해서 설명할 준비가 필요했다. 결국 새로운 감독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시행하지 못했고 과거 로바노프스키가 옳다고 생각한 것들에 대해서만 집중하게 되었다.


오파렐은 특정 선수를 처리하고 싶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버스비 경과 사적인 자리에서 골프를 즐기는 사이었다. 그런 경우는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게 된다. 현재 루이 반 할 같은 경우는 관중석에서 경기를 바라보는 알렉스 퍼거슨 경의 시선에 결코 주눅들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데이빗 모예스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리버풀이 자리에서 물러난 샹클리를 (훈련장에 오지 못하도록) 모질게 대한 것도 지금 회상하기에는 굉장히 매정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클럽 입장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리버풀의 부츠룸 (1960대부터 1990년 초반까지 안필드에 있는 공간으로 코칭 스태프의 회의가 있던 곳) 전통은 리버풀 감독직 자리의 왕관이 잘 인수될 수 있도록 도와준 하나의 시스템 구조가 되었다. 샹클리에서 밥 페이즐리로, 페이즐리에서 조 페이건으로 넘어가는 흐름은 대중의 환호에 관심이 없는 페이즐리의 존재감 덕분에 더 성공적이었다. 



권력의 공백


전제 군주의 배경에 무엇이 있었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다. 그의 존재를 무엇으로 대체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권력의 공백기에 새로운 세력이 떠오르게 되고 그 결과 맥기네스와 오파렐이 겪었던 것처럼 작은 규모의 혼란이 찾아올 수 있다. 어쩌면 더 심각한 규율 혼란이 올 수도 있다. 역사는 절대자가 물러나면 수많은 내전이 발생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현재 이러한 위험 속에 존재하고 있다. 특히 알렉스 퍼거슨 경이 물러날 당시 데이빗 길 단장 마저도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 더욱 그런 현상을 발생하게 만들었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팀은 아주 분명하게 두갈래로 갈라졌다 : 상업적인 부분에 더 신경을 쓰는 이사진이자 동시에 클럽에 새롭게 소개된 인물들 vs 연세가 있는 오로지 축구에 관련된 인물들, 특히 Class of 92 세대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분들


에드 우드워드는 전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고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부조화스런 스쿼드를 갖추도록 초래한 산만한 영입 정책을 총괄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빅네임을 영입해야 한다고 꾸준히 이야기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팀을 부유하게 만들겠다는 것에 기인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조세 무리뉴 선임에 대해서 긍정적인 인물들로 맨체스터 시티의 펩 과르디올라 부임 발표에 대해 슈퍼스타 (조세 무리뉴) 로 대응하는 것을 생각한다. 조세 무리뉴의 기록은 굉장히 단기적인 성공에 치우쳐있음에도 말이다.


그와 반대점에 존재하는 축구에 관련된 인물들은 논란을 끊임없이 제조하는 감독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이 되길 원치 않는다. 또한 그들은 무리뉴가 계속해서 떠나면서 남겼던 것들, 정신적으로 선수들이 지치는 것들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다. 무리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날 때 그런 상황이 반복되는 것에 대해 우려한다.


그러나 무리뉴 선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따로 있다. 무리뉴 부임은 클럽의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에 대한 해결이 될 수 없어 보인다. 앞으로 추가적인 비용이 지출되는 영입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에이전트들에게나 좋은 소식이지 클럽의 일관성 부분에 대해서는 결코 좋은 소식이라 할 수 없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2차례 황금기에 그 기반이 되었던 유스 시스템은 글레이져 가문의 인수 이후로 다소 방치된 부분이 있다. 1986년 론 앳킨슨의 자리를 이어받은 알렉스 퍼거슨 경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스 시스템 구조를 소생시켰으나 현재 유력한 감독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조세 무리뉴는 과거 행적을 보았을 때, 그것을 재현하기 어려운 인물로 보인다.


부유한 클럽은 트로피를 향한 길을 언제나 돈으로 살 수 있다. 그러나 그 성공을 유지하는 것은 단순한 돈 이상의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70년대와 80년대의 리버풀은 어떻게 다음 감독에게 권력을 이동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적절한 예시 모델이 될 수 있다. 전통을 깨는 것도 긍정적인 면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 1987년 케니 달글리시의 존 반스, 피터 비어즐리, 레이 휴튼 영입은 리버풀의 전통적인 영입 모델에서 벗어난 경우지만, 1987/1988시즌 리버풀은 짜릿한 축구를 선보였다.


어쩌면 그 때의 위대한 팀이 마지막 꽃봉우리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3명의 주요 선수를 영입하고 보다 창조적인 경기를 펼친 것은 리버풀에게 필요한 변화였다. 힐스보로 참사와 그로인한 후유증이 클럽을 덮어오기 시작했고 충격에 빠진 달글리시는 리버풀 감독직을 사임하게 된다. 자연스럽게도 리버풀은 내적인 부분에 신경을 쓰게되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처럼 프리미어 리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상업적 가능성에서 이점을 누리지 못했다.


레브로프가 디나모 키예프의 영광을 되찾고 있다고 주장하기엔 아직 시기가 이르다. 그러나 레브로프는 분명히 합리적인 모델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로바노프스키의 원칙은 여전히 디나모 키예프란 클럽의 원칙으로 남아있고 레브로프는 그런 로바노프스키의 위대함에 대해서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레브로프는 로바노프스키의 신조에 결코 구속받지 않는다. 그는 디나모가 과거에 성공했던 방식에 집착하지 않으며 진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새로운 정보와 아이디어는 기존 디나모의 것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착안하려고 한다. 레브로프는 다른 감독들처럼 위대한 로바노프스키의 그림자 밑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로바노프스키의 철학을 기반으로 한 상황에서 새로운 답을 찾으려 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우려해야할 것은 디나모 키예프가 이 해답을 찾는데까지 14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출처 : http://www.theguardian.com/football/blog/2016/feb/25/manchester-united-and-the-problem-of-moving-on-from-an-all-powerful-leader



by Jonathan Wilson


2014/2015시즌에는 8월이었고 2013/2014시즌에는 3월이었다. 2012/2013시즌에는 1월이었고 2011/2012시즌에는 3~5월이었다. 그리고 2015/2016시즌은 바로 지금이다. 아스날에게는 매시즌마다 우승 후보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시기가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스완지 시티에게 패배한 것은 우리의 뇌리에 가장 깊숙히 박혀버린 모습이 아닐까 싶다. 강력함의 부족은 아스날의 우승 가능성을 죽이고 있다.


지난 시즌에도 스완지 시티에게 홈에서 패배했는데 이번에도 동일한 결과가 발생했다. 그리고 아스날은 지난시즌 동일 라운드보다 고작 승점 1점을 더 획득한 상황이기 때문에 팬들은 더욱 열받고 있다. 이번에도 관습적으로 3~4위를 향해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며 프리미어 리그 우승 트로피는 점차 손에서 멀어져 간다.


과거 10년간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왔던 스토리와 올시즌 프리미어 리그의 스토리는 완전히 다르며 전례없는 수준의 흐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번에 아스날이 실패하는 것은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실패한다고 볼 수 있다.


아스날은 (아스날만의 기대치에 있어서) 굉장히 평범한 수준의 승점을 벌어들이고 있다. 현재까지 경기당 평균 승점은 1.82점인데 스완지를 상대로 승리했다면 1.93까지도 상승이 가능했다. 지난 10년간 아스날의 평균적인 승점은 1.92점이었는데 올 시즌에는 게다가 득점까지 누적된 평균값에 못미친다.


28경기가 지난 현재, 아스날은 경기당 평균 1.57골을 기록하고 있다. 현재까지 기록이 시즌이 끝나는 순간까지 이어진다고 가정한다면, 아스날은 시즌이 끝날 시점 60득점을 기록하게 되는데 이는 1999년 이후 가장 최저 수치가 될 것이다. 지난 10년간 아스날은 경기당 평균 1.88골을 기록해왔다.


현시점에서 아스날 입단이래 최악의 골가뭄 현상을 겪고 있는 올리비에 지루에게 대중의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또한 최근 두드러진 활약이 없는 시오 월콧도 마찬가지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중점을 두어야할 부분은 다른 곳에도 있다. 수년간 아스날은 상당한 수준의 기술력을 갖춘, 동시에 공을 점유할 줄 아는 선수들로 팀을 꾸려왔고 이런 특징은 아르센 벵거 임기 마지막의 동의어처럼 되버렸다. (벵거는 부임 초기 탄탄한 선수들을 바탕으로 빠른 역습 축구를 곧잘 구사했었다. 패트릭 비에이라, 엠마뉴엘 프티, 질베르투 실바가 백4를 보호하고 니콜라스 아넬카, 티에리 앙리, 프레드릭 융베리, 마크 오베르마스 같은 선수들이 위협적인 역습을 펼쳤다.)


아스날은 최근 들어서 엉덩이를 뒤로 뺀 경기, 상대의 거센 공격적 압박을 견뎌내는 경기를 펼치기도 했고 그 결과 지난시즌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승리했으며 올시즌에는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홈에서 2:1 승리를 기록했다. 또한 높은 지역에서부터 강한 압박을 펼치면서도 승부를 본다. 지난시즌 리버풀을 상대로 홈에서 그렇게 경기했고 올시즌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해 3:0 승리를 기록했다. 그러니까 아스날은 보다 더 유연해진 것이다.


현재 아스날의 수비 기록은 2009~2012년의 기록보다 개선되었으나 여전히 경기당 1골을 실점하고 있다. 만약 이것 또한 흐름이 지속된다면 시즌이 끝나는 순간 2014/2015시즌의 실점보다 2골 더 많은 실점을 기록하게 된다. 이는 2005년과 2009년보다 약간 안좋은 기록이지만, 그 때 아스날은 총 68득점을 기록했었다.


경기당 득점과 실점이 아스날의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진 못한다. 강팀에게 수비적 약점을 노출하더라도 약팀을 5:0으로 박살내버리면 득점과 실점 기록은 충분히 그럴싸하게 포장될 수 있다. 지난 10년간 아스날이 4골 이상 넣은 경기는 평균 4.5회였는데 올 시즌에는 그 횟수가 딱 1차례에 불과하다. 그런데 상위권팀을 상대로 얻어낸 경기당 평균 승점은 현재 1.56점으로 이 부분에서 리그 2위이다. (1위는 토트넘) 지난 3시즌간 아스날은 이 부분에서 6위, 5위, 8위를 기록했었다. 상위팀을 상대로 경기당 평균 1.06점을 벌어왔었다. 아스날이 경기 접근법을 수정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볼 수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이제 아스날은 상위권 팀에게 과거처럼 두들겨맞지 않는다. 그런데 중위권에게 승점을 헌납하고 있다. 아스날은 중위권 상대 성적에서 리그 13위를 기록 중이다. 그래서 우승 트로피가 아스날에게 가까이 다가왔으나 아스날은 이렇게 또 다시 우승에서 스스로 멀어져갔다.


수년간 아스날의 문제점은 전술적인 부분, 특히 벵거의 완고함으로 인한 실패라 인식되었다. 여전히 (벵거의 전술에 대한) 지적이 일부 사실이라 할 수는 있으나 이번의 경우는 멘탈적인 문제인 것으로 보여진다. 어쩌면 아스날은 실패하는 방법을 새로 발견한 것일 수 있다.


벵거는 종종 아스날의 '정신적 강인함'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러나 벵거가 그 강인함을 언급하는 순간은 항상 패배가 유력한 순간이었고 그 때야 선수들을 독려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어쩌면 그런 결점들이 아스날이 스스로 1위를 차지할 가능성을 갉아먹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벵거의 독려는 오직 그것 뿐만이 아스날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희망일 때, 상황이 너무나도 좋은 순간 아스날 선수들이 긴장을 풀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만드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출처 : http://www.theguardian.com/football/blog/2016/mar/03/arsenal-fail-title-arsene-wenger



by Jonathan Wilson


디에고 시메오네가 2011년 12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그 말은 즉슨 시메오네가 이제 아르헨티나에서 자신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데 상당한 시간적 제약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감독 부임이 확정되었을 때 그의 아들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럼 아빠는 이제 메시, 호날두랑 싸우는 거에요?" 아들도 그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했을거다.


시메오네는 마드리드에서 보낸 4년 반의 시간 동안 메시에게 딱 2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2차례의 타이밍은 매우 절묘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바르셀로나를 또 다시 8강에서 좌초시켰다. 아틀레티코의 바르셀로나전 승리는 상대의 스타 선수를 무력화시키는 탁월한 예시로 설명될 수 있을만큼 훌륭했다. 지금껏 시메오네에게 메시는 골칫덩어리였으나 이번에는 그 문제를 해결했다.


아틀레티코는 호날두로 대표되는 레알 마드리드와 또 한차례의 대결을 펼칠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른 거인을 물리쳐야만 한다. 1974년 유러피언 컵 결승전, 아틀레티코는 루이스 아라고네스의 프리킥으로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1:0 리드를 가져갔다. 종료가 임박한 시점에서 아틀레티코는 스페인 클럽 2번째로 유러피언 컵을 차지하는 팀이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종료가 임박한 시점에 게오르그 슈바르첸벡이 동점골을 넣어버렸다. 바이언은 재경기에서 아틀레티코에게 4:0 승리를 거두었고 아틀레티코는 그로부터 40년 후에야 다시 결승전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또 다시 세르히오 라모스에게 아틀레티코는 추가시간 동점골을 내주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관점에서 바이언을 4강에서 꺾고 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꺾는 것이 유러피언 결승전 악몽을 씻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시나리오일 것이다.


다가올 바이언과 아틀레티코의 대결은 1974년 결승전 이후 두 팀의 첫번째 대결이다. 시메오네는 과르디올라와 딱 1번 경기해봤고 당시 바르셀로나가 2:1 승리를 기록했다. 이번에 아틀레티코가 8강에서 바르셀로나를 상대한 것은 바이언을 상대하기에 아주 좋은 훈련이 되었을 것이다. 과르디올라는 바이언에서 더 진화했고 더 이상 4-3-3에 얽매이지 않으며 이제는 위험을 조금 더 감수하며 플레이 펼치고 롱볼 활용에도 마음의 문을 열어둔 상태다. 어찌되었건 과르디올라가 바르셀로나에 심은 축구주의는 뮌헨에서도 똑같이 뿌리내렸다.


분명 두 팀의 대결에서 바이언은 아틀레티코를 상대로 점유율을 지배할 것이다. 바르셀로나가 2경기 합쳐서 72%의 점유율을 기록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상대의 점유율이 높은 것은 시메오네에게 골칫거리가 되지 못한다. 시메오네의 아틀레티코는 공없는 상황에서 경기를 펼치는 것에 상당히 숙련된 모습이며 그가 내세울 4명의 미드필더들은 언제든지 뒤로 물러서 수비 라인으로부터 10야드 미만으로 배치될 가능성이 높다. 아틀레티코 선수들은 바이언의 공간을 죽일 것이며 동시에 적극적으로 앞에서부터 바이언을 압박하기도 할 것이다.


바르셀로나와의 2차전 경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아틀레티코가 세르히오 부스케츠와 풀백 사이의 공간에서 효율적으로 공을 차단했다는 점이다. 바르셀로나가 전형적으로 후방에서 볼을 뿌리는 방식을 방해한 것인데 이런 성향은 과르디올라의 바이에른 뮌헨과 교집합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딥-라잉 미드필더인 사비 알론소 혹은 티아구 알칸타라가 부스케츠의 역할을 맡고 좌우에 위치한 공격적인 풀백(필립 람과 다비드 알라바)이 바이언이 바르셀로나와 똑같은 전개를 펼칠 수 있게 만든다. 시메오네는 이 공간을 반드시 노릴 것이다.


수비의 마스터 시메오네 vs 가장 강력한 파괴자, 티키-타카의 대부이자 현대 축구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전략을 보유 중인 과르디올라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이 대진은 상당히 흥미롭다. 경기가 시작되기 이전까지 과르디올라가 주어진 선수 자원을 어떻게 배치할지 확신할 수가 없다. 과르디올라의 선택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걸 대비하고 직접 맞서 싸워야하는 시메오네에게는 큰 도전이 될 것이다.


시메오네에게만 골칫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도 바이언은 후반기에 살짝 리듬을 잃어버린 모습이다. 더글라스 코스타는 크리스마스 이전의 경기력이 아니고 유벤투스, 벤피카와의 경기에서는 지나치게 공을 점유하려는 모습도 있었다. 바이언이 겨울 휴식기 이후에 놓친 승점이 12경기에서 단 7점뿐이라는 사실은 바이언의 후반기 부진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유럽 대항전에서 수비력에 약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한 고민거리가 될 수 있다. 마누엘 노이어는 유벤투스, 벤피카와의 2차전에서 실수를 저질렀고 바이언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유벤투스의 압박은 시메오네에게 분명한 참고사항이 될 것이다.


과르디올라는 최근 3차례 모두 4강에서 고배를 마셨다. 지난 시즌에는 자신이 기반을 다져두고 떠난 바르셀로나의 뛰어남에 무릎을 꿇었지만, 그 이전의 2차례 패배는 모두 실용적인 경기를 펼치면서 결정적인 역습 상황을 노리는 팀에게 당한 것이었다. (레알 마드리드와 첼시) 아틀레티코는 이 사실에도 주목할 것이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2015/2016 UEFA 챔피언스 리그는 시메오네 아들의 체크리스트를 따를 수 있을까. 메시를 이긴다? 그건 이번에 해냈다. 호날두를 이긴다? (최근 마드리드 더비 전적을 본다면) 아마 그럴 수 있다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아틀레티코는 펩 과르디올라를 무찌르고 다음 단계로 올라가야 한다.



출처 : http://www.theguardian.com/football/blog/2016/apr/15/diego-simeone-pep-guardiola-atletico-madrid-bayern-munich-champions-league-semi-final




원문은 2016년 4월 8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by Jonathan Wilson


게겐 프레싱은 단순히 상대를 쫓아다니는 것을 발전시킨 형태로, 잉글랜드가 진작에 밟았어야할 전술적 진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잉글랜드는 잉글랜드만의 특징에 대해서 신념을 잃지 않고 클롭이 보여주는 것들을 잘 배워야 한다. 


5일 간격으로 펼친 2경기에서 리버풀은 모두 1:1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vs 토트넘 vs BVB) 두 경기 모두 수준 높은 경기였으며 동시에 굉장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경기였다. 위르겐 클롭 아래서 리버풀이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할만한 여러 증거들이 있는데 클롭은 리버풀의 축구를 재밌게 변화시킨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잉글랜드 축구, 잉글리쉬 스타일의 축구가 뛰어나고 재밌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클롭이 안필드에 도착했을 무렵, 사람들은 클롭의 게겐 프레싱(gegenpressing)에 대해 흥미로운 논쟁을 펼쳤는데 클롭이 성공하지 못할거라 콧방귀를 뀌는 냉소가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게겐프레싱의 본질적인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게겐 프레싱이 상대에게 가까이 다가가 공을 뺏으려 노력하는 것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물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차이를 보이지만 꼭 다르다고만은 할 수 없다. 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잉글랜드 클럽들은 공을 소유한 선수를 쫓아가 압박을 해야한다는 의식을 보였고 그렇게 '에너지와 끈질김'은 잉글랜드식 게임의 특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압박이란 개념은 시기적으로 거의 동시에 잉글랜드, 네덜란드와 소련에서 탄생했다. 당시 유럽의 축구는 2가지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북쪽은 백4와 압박으로 대변되었고 남부는 리베로를 두면서 내려앉는 형국이었다. 많은 혁신이 그래왔듯이 발전에는 적합한 타이밍이라는게 있다. 백4 시스템은 1958년 월드컵 이후에 영양 공급의 발달과 스포츠 과학의 발전과 동시다발적으로 전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그런 환경 속에서 급진적인 변화를 밀어붙일 수 있었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까지 잉글랜드 클럽의 성공은 압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상대보다 더 열심히,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로 대표되는 잉글랜드만의 뚜렷한 특징은 다른 유럽 클럽들이 두려워하는 특징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헤이젤 참사 징계로 인해 잉글랜드 클럽들은 엘리트 클럽들과 맞대결을 펼치지 못하게 되었고 잉글랜드는 뒤쳐지기 시작했고 열등감은 커지기 시작했다.


유럽 무대는 잉글랜드 클럽에게는 (자국에서 경험하지 못할) 이색적인 무대이자 세련된 대결의 장소였고 그들은 잉글랜드보다 월등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유럽에서의 모든 패배는 비슷한 패턴을 지니고 있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1994년 바르셀로나에게 0:4로 패배했을 때, 우리는 유럽의 트렌드를 확인할 수 있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유럽에서 잉글랜드가 패배한다는게 잉글랜드가 트렌드에서 뒤쳐진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러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요한 크루이프의 팀에게 완패당한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동시에 국가대표팀 레벨에서도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4강의 긍정적인 면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유로 1992에서는 형편없는 모습이었고 1994년 월드컵은 본선에 진출하지도 못했다. 잉글랜드가 롱볼 축구를 선호하는 것이 결국에 잉글랜드 축구에 독이 되어 돌아온다는 의견이 있었다.  


어린 선수들이 더 편하게 공을 다루고 패스할 수 있도록 가르칠 지도자 육성이 잉글랜드에게 필요한 해결책이라 의견이 모였다. 여전히 그럴 지도자 수가 부족하다는 것이 부끄러인 일로 여겨지지만, 진정한 문제는 잉글랜드가 '발전'에만 사로잡혀 정작 본인들이 잘했던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1994년 네덜란드가 잉글랜드의 월드컵 진출을 좌절시켰고 1995년 루이 반 할의 위대한 아약스가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하자 네덜란드식은 잉글랜드의 롤모델이 되었다. 프랑스가 1998년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2000년에 유로에서 우승하자 클레르퐁텐을 따라하자는 것은 또 유행이 되었다. 그 이후 스페인이 급격하게 부상했고 3개의 대회에서 연속으로 우승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네덜란드식과 카탈란식이 합쳐진 라 마시아 모델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제는 또 독일이 나아갈 방향이라 말하고 있다.


물론 잉글랜드 축구는 다른 축구문화에서 많이 배워야 한다. 현재 잉글랜드의 위상은 90년대 초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현재의 잉글랜드는 문제를 선수 구매로 해결하려는 기본적인 기조를 보이고 있고 기존의 자원을 잘 살려보겠다는 개념은 사라진지 오래다. 결국 무엇이 잘못되었을 때, 우리의 해결책은 외부에 있다는 결론만 내리게 된다.


클롭은 잉글랜드가 무엇을 잘했었는지 우리에게 다시금 상기시켜줬다. 클롭의 게겐 프레싱은 잉글랜드의 특징을 발전시킨 형태고 잉글랜드 클럽들은 그런 기질로 과거 유럽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잉글랜드는 자신들이 잘하던 것에 대한 신념을 잃지말고 장점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 토트넘과 리버풀전에서 보여준 리버풀의 경기는 80년대 축구의 더 빠르고 더 깔끔한 버전이었다. 다소 주관적인 판단일 수 있겠지만, 펩 과르디올라식 기교있는 축구, 각자 자기 턴에서 공격을 시행하는 농구 스타일의 리듬에 대해 싫증을 보이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지난 5일 사이 리버풀이 보여준 압박 축구는 빠른 템포의 축구, 치열하게 치고받는 축구에서도 상당한 퀄리티를 느낄 수 있다는걸 우리에게 상기시켜줬다. 전방으로 빠르게 공을 보내는 것으로 상대의 압박을 우회할 수 있다면 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있을까?


리버풀이 그 2경기에서 이기진 못했지만, 리버풀 팬들에게는 충분히 고무적인 경기력이었다. 비록 이 경기가 2명의 독일 감독과 1명의 아르헨티나 감독이 펼친 대결이었으나 이 경기는 잉글랜드가 잘했던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 경기였다. 그래서 잉글랜드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출처 : http://www.theguardian.com/football/blog/2016/apr/08/jurgen-klopp-liverpool-english-football-gegenpressing